전북 전주시 노송동 주민센터에 27일 오전 9시7분쯤 전화가 한 통 걸려왔습니다. 주민센터 직원들은 전화에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매년 이맘때쯤에는 기다리는 전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화 통화는 단 두 마디로 끝났습니다.
“주민센터 지하주차장 입구에 종이상자가 있습니다. 어려운 이웃에 힘이 돼 주길 바랍니다”
주민센터 직원들은 황급히 지하주차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곳에는 A4 용지를 담는 종이상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상자 안에서는 오만원권 1000장과 배가 가득 찬 돼지저금통이 나왔습니다. 총 5020만1950원이었습니다. ‘소년 소녀 가장 여러분 힘내십시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적힌 편지도 동봉됐습니다.
이는 노성동 주민센터의 연례행사 같은 일입니다. 일명 전주 노송동 ‘얼굴 없는 천사’. 그는 19년째 성탄절 전후에 나타나 돼지저금통을 두고 갑니다. 주민센터에 전화를 걸고 먼발치에서 직원이 성금을 들고 가는 것만 확인한 후 홀연히 사라지죠. 그가 누군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전화 목소리로 40~50대의 남성으로 추정할 뿐입니다.
‘얼굴 없는 천사’의 선행이 시작된 것은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한 초등학생을 통해 58만4000원이 든 빨간 돼지저금통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주민센터에는 또다시 74만원이 든 돼지저금통이 도착했습니다. 천사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올해까지 19년간 전달한 성금의 총액은 무려 6억834만660원입니다. 성금은 기탁자의 뜻에 따라 생활이 어려운 소년 소녀 가장과 조손가정 등 어려운 계층을 돕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얼굴 없는 천사가 베푼 것은 그저 돈이 아니었습니다. 천사의 사랑은 바이러스처럼 퍼져나갔습니다. 노송동 주민들은 2011년부터 매년 10월 4일을 ‘천사(1004)의 날’로 정해 불우이웃을 돕는 행사를 벌이고 있습니다. 지역 공동체 사업인 ‘천사길 사람들’을 구성해 소외 계층 후원 사업을 벌이기도 합니다. 전주시는 천사의 선행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우고, ‘얼굴 없는 천사’를 미래유산으로 지정했습니다.
“소년소녀가장 여러분, 힘든 한해였지만 우리에게는 희망이라는 선물이 있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얼굴 없는 천사가 2016년 성금과 함께 남긴 편지입니다. 그의 말처럼 각박한 이 세상에도 ‘희망’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천사 같은 사람이 아직 존재하기 때문이죠. 그는 어려운 이웃에게 희망을 선물하는 동시에 그의 존재 자체로 우리에게 희망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직업, 나이, 얼굴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베푼 사랑이 시린 겨울을 온기로 적시고 있습니다. 그는 어쩌면 정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살만한 세상]은 점점 각박해지는 세상에 희망과 믿음을 주는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힘들고 지칠 때 아직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아살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세요. 따뜻한 세상을 꿈꾸는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강문정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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