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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교동사람들] 서교동282 김현아씨

사람들은 소위 잘나가는 이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 검·경 연예인 스포츠 스타를 소개하는 기사는 많지만 평범한 이웃들의 삶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들도 다 사연이 있고, 소중한 이야기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서교동282 입구

주소가 마포구 서교동 282번지인 줄 알았는데 아니랍니다. 그럼 가게 이름이 왜 282인가요? 물었더니 “친구들이 말하지 말랬는데…” 말끝을 흐리며 민망해합니다. 삐삐 쓰던 시절 우린 숫자로 의미를 전하곤 했습니다. 486은 사랑해, 825는 빨리 와, 0288은 열이 펄펄, 045는 빵 사와…, 이런 식으로 말이죠. 282는 예쁜이라는 의미입니다. 서교동 282=서교동 예쁜이. 김현아(37)씨는 가게 이름을 설명하면서 어색하게 웃었고 저는 애써 웃음을 참았습니다. 가끔 282가 뭐냐고 묻는 손님이 있는데, 그럴 때마다 뜻을 알고 있는 단골들은 창피해서 고개를 숙인답니다.

주방장갑을 낀 왼손을 들고 웃고 있는 김현아씨

가게를 처음 낸 건 2017년 8월 22일입니다. 오픈 한 달 뒤 손님들을 모아놓고 공연을 했는데 이날 현아씨도 술을 거하게 마셨습니다. 가게 문을 닫고 2차를 가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왼팔이 부러졌습니다. 그 후 단골들은 ‘서교동 이팔이(282)’ 대신 ‘서교동 외팔이’라고 부릅니다. 영업 후에 단골과 술을 마실 때도 있는데 술에 취해 비틀대면 ‘서교동 비틀이’가 됩니다. 손님들과 이러고 놉니다.

눈치 채셨겠지만 현아씨는 술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술집을 차린 겁니다. 처음엔 음식을 할 줄도 몰랐습니다. 오픈 당시 메뉴는 김삼두(김치+삼겹살 수육+두부), 차돌부추, LA갈비 이렇게 3개뿐. 고작 안주 하나 만드는데 40분이나 걸려서 어떤 손님은 무슨 남도음식으로 한상차림이 나오는 줄 알았답니다. “용케 가게를 내셨네요?” 물었더니 “저는 술 마실 때 안주보단 누구랑 마시는지와 가게 분위기가 더 중요했거든요.” 라고 답합니다. 본인과 다른 사람이 수두룩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지금은 요리 수준이 수준급입니다.

서교동282 내부

현아씨는 루이비통과 프라다에서 15년 정도 일했습니다. 프라다 미우미우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지점장이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마흔이 넘으면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을까? 서른일곱에 퇴사를 결심합니다. 2년 정도 도전해보고 안되더라도 마흔 전엔 또 다른 도전을 할 수 있을거야. 바로 가게 자리를 알아보러 서울 곳곳을 돌아다녔습니다. 서교동은 1년에 한 번 올까 말까한 동네였는데 지금 가게가 있는 산울림소극장 뒷골목을 발견하곤 바로 여기로 결정했습니다. 현아씨는 “가게에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온다”고 했습니다. 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간략히 적자면,

남자는 15살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건축을 공부했습니다.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가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집니다. 여자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프랑스로 돌아가 한 달 만에 유학 생활을 정리하고 아예 한국에 들어옵니다. 그러나 남자의 인생을 바꿔놨던 그 여자는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집니다.

또 다른 남자가 있습니다. 노래를 하는 가수입니다. 듀엣이었는데 문제가 생겨 지금은 혼자 노래합니다. 겉에서 봤을 땐 화려해 보이지만 이런저런 가정사를 혼자 해결해야 하는 아픔이 있답니다. 자세하게 적긴 어렵지만 그도 얼마 전 시련을 당했습니다.


이런 상처를 갖고 있는 남자 6명은 가게에서 자주 마주쳤습니다. 우연히 만나 서로를 위로하다 ‘282와 아픈 손가락’이란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나이순이 아니라 상처의 크기 순으로 서열도 정했습니다. 가장 큰 상처를 안고 있는 남자가 엄지, 그 다음이 검지, 이런 식으로 말이죠. 6명이니까 오른 손은 끝났고 왼손 엄지까지 채워졌습니다. ‘서교동 282’엔 상처를 보듬어 주는 뭔가가 있나봅니다. 혹시 상처가 있다면 들러보세요. 아직 왼손의 검지 중지 약지 새끼손가락이 남아있습니다.

서교동282에 온 손님들 모습

원래 현아씨의 꿈은 연극을 연출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지원했다가 세상에 뛰어난 사람이 많다는 걸 깨닫고 꿈을 접었습니다. 그런데 가게에선 매일같이 새로운 이야기가 연극 대본처럼 씌여지고 있었습니다. 현아씨가 꺼낸 노트엔 손님들의 특징이 개미처럼 빼곡하게 적혀 있었죠. 가게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들은 누군가 연출한 게 아니라 우연히 벌어진 것들입니다. 다만 그런 스토리를 발견하고 기록한다는 건 그만큼 현아씨가 손님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있었다는 의미겠죠. 세상에 상처 없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다만 그 상처를 위로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래서 그 상처가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 그게 중요하겠죠.

그날그날 온 손님들의 특징이 적힌 노트

*주 필자가 살던 곳이 상수동이어서 문패가 ‘상수동 사람들’이었던 건데, 얼마 전 서교동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앞으론 ‘상수동·서교동·망원동·연남동’ 네 동네에서 인터뷰 한 뒤 그때그때마다 문패를 바꿀 계획입니다.

이용상 기자 sotong20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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