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번 김OO 군’ ‘30번 이OO 양’처럼 출석번호를 남학생은 앞, 여학생은 뒤부터 매기는 것은 ‘성차별’이라는 국가인권위원회의 판단이 지난 9일 내려졌다. 아이들에게 남녀 간 선후가 있다는 차별의식을 갖게 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현재 우리 사회는 문제 제기와 갑론을박을 통해 그 어느 때보다 여성 인권을 활발하게 논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가정에서는 어떤 변화가 있을까? 가정에서도 성 평등은 이뤄지고 있을까? 한국 사회 페미니즘 이슈의 당사자인 20대 여성에게 물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현재 20대 여성들은 모두 90년대생이다. 20세는 99년생, 29세는 90년생이다. 분명 90년대에 태어난 여성들은 이전 세대와 비교해 훨씬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남성과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받았다. 실제로 남학생들과의 학업 경쟁에서 우위에 선 첫 번째 세대기도 하다. 상당수는 자아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결혼보다 취업을 더 중시하며 사회에 진출해 성공하려는 욕구가 또래 남자와 비교해 결코 약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90년대생 여성들은 가부장의 억압도 덜 받고 자라왔을 거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가정에서의 성 평등은 여전히 부진했다.
◆ 오빠만 보내주는 미국 유학, 성인이 돼서도 설거지 못 하는 남동생
대학원생 A(27)씨는 “가정에서 마주한 가부장제의 잔재들은 여성들로 하여금 ‘현실은 여전히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고 말했다. A씨는 “현재 20대 여성들은 민주화가 이뤄지고 남녀평등 사상이 확산하는 시기에 태어나 학교에서는 남녀가 평등하다고 배워왔다. 하지만 90년대까지만 해도 가부장제와 남아선호사상이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20대 여성의 이론적 인식과 실제적 삶 사이에는 모순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가정에서의 성평등은 사회에서의 성평등보다 더 늦게 이뤄진 부분이 있다”고 했다.
A씨는 “한번은 내가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다는 말을 하자 아빠는 ‘여자는 시집만 잘 가면 된다. 그렇게까지 공부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며 “반면 오빠는 부모님 돈으로 이미 미국 유학도 다녀왔고 부모님이 여전히 뒷바라지를 해주고 있다”고 했다. A씨는 “내가 고등학생 때는 ‘이렇게 공부를 안 해서 시집은 어떻게 갈래’라는 말도 들었는데, 그때마다 ‘나를 공부시키는 이유가 단지 좋은 집에 시집보내기 위해선가’라는 생각이 들어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마치 아주 옛날얘기를 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실제로 90년대생 여자들은 가정에서 이런 차별을 여전히 겪고 있다”고 덧붙였다.

직장인 B(28)씨는 “어릴 때부터 당연하다는 듯이 집안의 가사노동을 도왔지만 남동생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며 “성인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B씨는 “동생은 어릴 때부터 설거지는 물론 방 청소 한번을 하지 않았다. 지금도 저녁 식사가 끝나면 자기 그릇조차 치우지 않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며 “엄마는 그런 남동생의 행동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내가 퇴근 후 너무 피곤해서 엄마를 돕지 않으면 온갖 서운한 티를 다 내신다”고 말했다.
대학생 C(25)씨는 “먹는 거 가지고 차별받는 게 제일 치사하고 상처받는 일”이라며 “한 번은 저녁에 삼겹살을 구워 먹는데 내가 고기를 막 집어 먹자 엄마가 ‘너는 살이 찌니까 그만 먹어라’ ‘동생 거 뺏어 먹지 말라’며 타박하셨다”고 말했다. 그는 “당장 식습관만 봐도 남동생은 고기반찬이 없으면 밥을 안 먹는다고 엄청나게 걱정하시면서 내 경우에는 그냥 있는 반찬 꺼내먹으면 안 되겠냐고 하는 게 보통”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C씨는 “일각에서는 이전 세대와 비교해 우리 세대가 무슨 차별을 받아 왔다고 이런 분노를 쏟아내냐고 묻기도 한다. 하지만 예전에는 여성 인권에 대한 교육 수준도 지금보다 더 낮았고, 절대적 빈곤과 같은 생존의 문제가 존재했다. 따라서 성평등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거나 그냥 참고 살았던 거라고 생각한다”며 “이러한 문제 제기는 갑자기 터져 나온 게 아니라 대다수 여성이 겪었던, 겪고 있는 문제”라고 말했다.
◆ 사회 곳곳에 성차별 여전… 10명 중 8명 “여성에 대한 차별 존재한다”
국민 10명 중 8명은 한국 사회 곳곳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 존재한다고 응답했다. 시장조사 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2017년 19~59세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남녀평등 및 여성차별 문제에 대한 인식조사’ 결과, 우리나라가 다른 국가에 비해 여성에 대한 차별이 적은 사회라고 바라보는 시각은 전체 18.5%에 불과했다. 10명 중 8명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차별받는 일이 발생한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남녀의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없는 편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9.4% 수준에 그쳤다.
사회 전반적으로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강하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지난 4월 전국 만 19~59세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 및 남녀차별과 관련한 인식조사’에서 전체 10명 중 7명(67.9%)은 여전히 가정 내에서 남녀의 고정적인 성 역할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연령과 관계없이 이런 인식은 비슷했으며, 남성보다는 여성이 가정 내에서부터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나눠진다는데 더욱 공감하는 모습이었다.
◆ 가정 내 여성의 낮은 지위, 왜?… “유교 영향력으로 인한 가부장적 제도 때문”
이렇게 한국 사회에서 남녀평등문화가 제대로 정착되지 못하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으로는 뿌리 깊은 ‘유교사상’(48%·중복응답)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가장 컸다. 수백 년 동안 우리나라를 지배해온 유교 사상의 흔적으로 인해 여성 차별적인 문화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가정 내에서부터 고착화 된 성 역할에 대한 인식(43.3%)을 원인으로 보는 시각도 강했다. ‘남성은 이래야 한다, 여성은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어린 시절부터 가정 내에서 형성된다고 보는 것이다.
한 여성 단체 관계자는 “A씨가 아버지에게서 들어온 말들은 유교 사상의 영향을 오래 받아온 여성에 대한 인식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는 “A씨의 사례는 여성의 삶에 제한을 두려는 가부장제의 산물”이라며 “한국 문화에서는 여성이 이뤄야 하는 사회적 성공을 장차 남편이 될 사람을 보조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 고정관념에 갇히게 되면 결국 여성이 가질 수 있는 최종 목표는 ‘좋은 남자를 만나 시집을 잘 가는 것’ 밖에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사회학자 프레드 아놀드도 자신의 연구결과를 통해 “동양 문화권에서 여성이 특히 가정 내에서 낮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원인은 유교 영향력으로 인한 가부장적 제도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동양권 문화의 여성은 가족 내 성 차별화된 계급구조 속에서 남성에게 복종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왔다. 이러한 상황이 혼인 전에는 아빠에게 의지하고, 혼인 후에는 남편에게, 남편이 사망한 후에는 아들에게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라며 “따라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가정 내 지위를 갖게 되고, 기혼여성은 본능적으로 여아가 아닌 남아를 원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아놀드는 “그래도 과거와 달리 현대 사회의 모습은 많이 변화됐다. 사회뿐만 아니라 가정도 남녀의 공동영역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새로운 규범이 젊은 층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다”며 “결국 가정 내에서의 성 평등 가치관 확립을 통해 여성은 전통적 지위에서 탈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신혜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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