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민 조한정씨가 마지막까지 버틴 이유

Է:2018-03-30 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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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가 마지막이 될지 모르지만 끝까지 맞설 것”

서울 성북구 장위7재개발구역의 마지막 남은 주민인 조한정씨가 29일 철거로 황량해진 동네를 바라보고 있다. 윤성호 기자

서울 성북구 장위동 197-54번지 주택의 가장 높은 곳에는 교회탑이 있다. 1층에 작은 교회가 있었던 흔적이다. 재개발로 교회가 자리를 비우면서 탑은 이제 다른 역할을 한다. 강제 집행이 시작되면 엠프가 설치된 교회탑에서 집행의 시작을 알리는 사이렌이 웽하고 울린다.

29일 그 사이렌이 또다시 울렸다. 검은 양복을 입은 경비용역 수십여명이 텅 빈 장위동 골목으로 밀려들어왔다. 순식간에 장위동 골목이 봉쇄됐다. 집행관과 경찰을 제외한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다. 집 안팎에서 강제집행을 막기 위해 밤을 지새운 3~40명의 연대자들은 전열을 정비했다. 조한정(58)씨는 이 모든 광경을 탑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조씨는 32년째 이곳에 남은 마지막 주민이다. 그가 살고 있는 장위동 197-54번지 빨간 벽돌의 2층 상가주택은 32년 전 밖으로 나도는 막내아들을 붙들기 위해 아버지가 마련해 준 집이다. 조씨는 “아버지의 정이 느껴지는 집을 포기할 수 없어 1990년대 신도시 붐이 일었을 때도 이사를 갈 수 없었다”고 했다.

처음부터 혼자는 아니었다. 강제집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만 해도 재개발 조합의 보상에 반대하는 주민이 130여명에 달했다. 하지만 조합이 “집을 비우지 않으면 부당이득금을 하루에 50만원씩 물리겠다고 협박하자 평균 연령 65세 이상의 노쇠한 이웃들은 남은 것 마저 뺴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조합과 합의를 했다.



조씨는 그렇게 합의할 수 없었다. 그는 “재개발조합이 조씨에게 제시한 보상가격은 실거래가의 절반도 안 된다”며 “대출금과 양도세, 세입자들의 임대보증금을 내주고 나면 손에 쥐는 돈이 없다”고 했다. 욕심이 아니라 살길이 없었다고도 했다.

지난해 11월 7일 첫 강제집행이 들어왔다. 조씨는 “아내가 오들오들 떨면서 ‘나 죽이고 이 집 가져가라’고 소리쳤지만 소용이 없었다”며 “이 세상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절박한 심정에 몰린 그는 자해를 했다. 4시간의 수술 끝에 가까스로 생명을 건졌다.

조씨 소식을 듣고 32년간 살아온 심대구(72)씨가 찾아왔다. “같이 버텨보자”고 했다. 20년간 장위동에 산 윤정연(가명·53·여)씨도 참여했다. 주민 몇 명이 더 참여해 5명 주민이 미니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조씨가 위원장이란 직함을 달았다.

투쟁은 오래가지 못했다. 강제집행이 시작되면 지게차와 포크레인이 들어와 집을 부수려고 했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온 몸으로 막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얼마나 소리를 질렀던지 강제집행 한 번에 일주일간 목소리가 안 나왔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벅찬 일이라고 했다.


윤씨는 지난 21일 조합과 합의했다. 지난 14일 진행된 강제집행 때 고등학생 막내아들은 집에 들어가기 위해 조합측이 고용한 경비용역과 몸싸움을 벌여야 했다. 아들은 울었고 온몸에는 피멍이 들었다. 더 이상 아이들에게 상처를 줄 수 없다는 생각에 윤씨는 투쟁을 포기했다.

마지막 남은 심씨도 지난 23일 보상금을 받고 떠나기로 했다. 집을 지키려다 노트 공장까지 폐업한 심씨였다.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강제집행 덕에 불안해 잠도 잘 수 없었다. 몸도 마음도 상한 심씨는 더 이상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공장 세입자 2명은 합의대상 조차 아니라며 홀대 받았다. 그렇게 조씨는 마지막 철거민이 됐다.

홀로 남은 조씨에게 심경을 물었다. 그는 “투쟁을 하면서 그를 물심양면으로 돕는 수많은 사람들을 알게 됐다”며 “행복하다”고 했다. 이어 “지난해 11월 덧없이 산 속에서 쓸쓸히 죽어가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임종을 지켜봐주는 것 같다”고도 했다. 그는 언제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강제집행에 끝까지 맞설 생각이다.

심우삼 기자 s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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