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훌륭한 조상을 갖고 있다는 게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쿵웨이커에게는 적어도 그렇다.
중구 산둥성에서 활동하는 화가이자 정협 위원인 쿵웨이커는 공자의 78대 후손이다. 1960년대 문화대혁명의 광풍 속에 쿵웨이커는 공자의 후손이라는 것은 멍에나 다름 없었다. 학교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받는 것은 물론 다니던 초등학교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그의 조상 공자가 봉건시대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쿵웨이커는 “당시는 정말 성을 바꾸고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쿵웨이커는 요즘 자신이 공자의 후손이라는 게 자랑이 됐다. 시진핑 체제가 들어선 이후 유교가 부활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 최근 중국에서는 조상의 뿌리를 찾는 작업이 활기를 띠고 있다고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19일 전했다.

중국의 대표적인 전자상거래 업체인 징둥의 류창둥 최고경영자(CEO)는 지난 1월 공개적으로 자신의 뿌리 찾기 작업을 도와달라고 호소하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일부는 중국 전통과 가족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류창둥을 칭찬했지만 일부에서는 불필요한 일에 힘을 쏟는다는 비난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쿵웨이커는 공자 후손이라고 비난을 견디며 집안의 족보가 온전히 보존된 데 대해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 공씨 집안 족보는 15년 전 업데이트됐다. 전문 자료 수집팀에 의뢰해 중국 내는 물론 해외의 공씨 가문의 구성원까지 합쳐서 가계도를 완성했다. 쿵웨이커는 “족보 덕분에 나를 비롯해 다른 공자의 후손들이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고, 연대감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문화대혁명 이후 개혁·개방의 시기를 거치면서 중국의 부는 증대되고 다소 느슨한 정치 환경이 조성되면서 중국인들의 뿌리 찾기는 더욱 활기를 띠게 됐다.
닝보대학 첸마오웨이 교수는 “과거 중국인들의 족보에 대한 집착은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와 고대 이후 지속된 조상 숭배의 전통에서 비롯됐다”고 분석했다. 첸 교수에 따르면 한나라와 당나라 때는 가계(家系) 기록은 집안 권위의 과시와 다른 집안과의 혼인에 연관돼 있다. 이후 송나라 때는 집안 관리와 규율에 초점을 맞췄다. 첸 교수는 “조상을 숭배하고 전체 집안을 조화롭게 관리하는 것은 족보를 만드는 핵심 이유”라고 설명했다.

20세기 들어서 문화적, 정치적 격변 속에 이러한 전통은 파괴됐다. 현대 중국 성립 이후 전국의 모든 마을들은 집안의 어른이 아닌 국가 관리들에 의해 통치됐고 집안 사당은 파괴되고 족보들은 불태워졌다. 특히 문화대혁명기에는 가계 혈통은 봉건 사회 잔재로, 완전히 사라져야 할 것으로 여겨졌다. 첸항 상하이사범대 교수는 “많은 집안에 족보가 소실된 것은 혈통 사이의 유대감을 약화시켜 온 중국의 급격한 도시화와도 연관이 크다”고 진단했다.
중국에 혈통 찾기 붐이 일고 있지만 완전한 복원이 쉽지 않은 이유다. 퇴직 공무원으로 올해 70세인 우진룽은 가계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지만 100여년 전까지만 성공했다. 다행히 6대 조상까지는 고향에 가계도가 있었지만 그 이전 기록들은 사라졌기 때문이다. 우씨는 “족보는 나의 뿌리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것”이라며 “하지만 이전 조상들의 기록을 찾지 못해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모든 사람들이 조상 찾기에 대해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포청천으로도 유명한 송나라 때 관리 바오정(包拯·포증)의 35대 후손인 바오전톈은 “조상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조상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항상 옳은 일을 하고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송나라 때 대문호 쑤스(蘇軾·소식)의 30대 후손인 쑤모씨는 “조상이 쓰스라고 해서 내 실생활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말했다.
맹경환 기자 khmae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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