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추행 고발, 20대 여성 김소희가 겪은 ‘또 다른 싸움’
상습적으로 치근거렸던 A씨
호소해 봐도 계란으로 바위치기
남성 직원들은 장난처럼 맞장구
결국 마지막으로 경찰에 신고하자
여성 직장동료까지 왕따에 가세
회사 측에선 대놓고 합의 종용
담당경찰은 수사 의지 없이 대충
검찰 가서야 재수사로 마무리
“저…제가 회사에서 성추행을 당했는데요.”
20대 여성 김소희(가명)씨가 경찰서를 찾아 이 말을 꺼낸 건 지난해 4월이었다.
그 회사는 대학 4학년이던 2015년 취업계를 낸 뒤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한 곳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들어간 첫 직장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공간이었다고 한다.
강원도의 한 소도시, 남자 직원들로 가득한 회사. 성희롱은 물론 성추행까지 빈번하게 벌어지는 회사에서 김씨는 정신과 치료를 받을 정도로 괴로워했다. 처음엔 ‘이런 게 사회생활이겠지’라며 참아보고, 나중엔 ‘하지 마시라’고 소리도 쳐 봤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결국 김씨는 2년 이상 지속적으로 자신을 성추행했던 상사 A씨를 고소했다.
춘천지법 원주지원 형사1단독 조승우 부장판사는 최근 A씨의 강제추행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고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선고 직후 김씨는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피해가 입증돼서 정말 다행”이라며 웃었다. 하지만 김씨가 털어놓은 지난 2년간의 회사생활은 악몽의 연속이었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성희롱에 성추행까지…정말 많은 일이 있었죠. 다 기록하기도 어려울 정도였어요. 경찰에 신고하려 하니 정확한 날짜와 장소, 당시 상황 등을 기억해야 한다더군요. 지난해 4월 A씨가 제 뒤에 다가와 ‘내가 등 긁어줄까’라며 속옷 상의 끈을 위아래로 내린 거나, 회식 하며 제 엉덩이를 만지고 껴안은 것 등. 이렇게 4건의 기록을 찾아 신고했지만 그건 제가 겪었던 성추행의 1%도 되지 않았어요.”
김씨는 자동차·건설 계열 회사에서 근무했다. 남자 직원 10명, 여직원 2명이 한 팀이었다. 20대 초중반 여직원들은 경리·비서 업무를 맡았다. “하루하루 근무할수록 회사 분위기가 이상하게 느껴졌어요. 팀장이었던 A씨는 여자 대리의 엉덩이를 발로 차면서 ‘내가 지금까지 이렇게 때려가며 키웠다’고 말하고, 지나가는 제 엉덩이를 손으로 찰싹 치기도 했어요. 하지 말라고 항의해도 다른 직원들은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 너무 과민반응하지 마’라는 식으로 묵인했죠.”
김씨가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싫다고도 해보고, 울었던 적도 있다. 진지하게 “이런 짓은 하지 말라”고도 해 봤다. 정색하는 김씨에게 남자 직원들은 모든 게 장난인 것처럼 굴었다. 오히려 김씨가 이상하다는 식으로 몰아가기도 했다.
성희롱은 김씨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A씨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스무 살 여자 아르바이트생에게도 ‘너는 앞뒤가 구분이 안 간다’는 식의 성희롱을 했어요. 아르바이트생이 울면서 회사를 나가고 이튿날 부모님까지 찾아왔지만 A씨는 출근하면서 태연하게 ‘어려서 그런지 오버하더라’고 말하더군요. 아무 죄책감도 없이….”
김씨는 이 순간 ‘신고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A씨가 모든 직원들 앞에서 웃으며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걸 보면서 여자로서 너무 수치스러웠습니다. 한편으로는 내가 꼭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위로를 해주려 아르바이트생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울먹이는 목소리를 듣자 괜히 제가 미안해졌습니다. 언니로서 여자로서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제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어요.”
김씨는 평소 A씨의 신체접촉 사진과 카카오톡 메시지 등을 경찰에 증거자료로 제출했다. 남자 동료들은 A씨가 성추행을 할 때마다 장난삼아 이 모습을 찍어 직원들의 카톡 단체 대화방에 올렸다고 한다. 이것이 증거가 됐다.
‘왕따’의 시작
신고를 한 뒤 김씨는 5일간 결근했다. A씨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인사부에서 전화가 왔다. “무작정 출근을 하지 않으면 불이익이 갈 수 있고, 보통 여직원이 힘들어지는 게 현실이니 부서를 옮기거나 퇴사하라”는 통보였다.
가해자가 아니라 왜 피해자더러 피하라고 하는 걸까. 김씨는 부서 변경이나 퇴사는 절대로 안 하겠다고 다짐했다. 인사부에 얘기했다. “저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가해자를 퇴사시키거나 다른 부서로 보내고, 사내 공고를 붙여 경각심을 일으켜 주세요.”
회사는 결국 A씨에게 3개월 감봉 처분을 내렸다. 회사 내 다른 지점으로 발령도 냈다. 그때부터 직원들의 따돌림이 시작됐다. 점심시간에 아무도 같이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하지 않았다. 평소 다 같이 식사를 하는 사무실이었다. A씨는 다른 지점으로 발령 난 뒤에도 계속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법원 가도 벌금 300만원이면 끝이다. 성범죄는 처벌이 약하니 합의하자’는 내용이었다.
꽃뱀이라는 소리도 등 뒤에서 들려왔다. 돈 때문에 그랬다는 오해와 손가락질은 여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김씨는 이런 상황에서 두 달간 근무했다. 직장 내 따돌림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고 회사에선 “적당히 합의하라”고 압박했다. 여성심리상담센터에서 치료도 받아봤지만 김씨는 결국 퇴사 절차를 밟았다.
“여검사님 만나서야 겨우…”
신고를 받은 경찰은 어땠을까. 김씨가 국선변호인의 도움을 받고 싶다고 하자 사건을 담당한 남자 경찰관은 “기초생활수급자가 아니면 안 된다”고 엉뚱하게 답했다.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국선변호인 선임은 소득 수준과 상관이 없다. 김씨는 “성폭력 상담센터에서 이 사실을 확인한 뒤 재차 국선변호인 선임을 요구했다”며 “겨우 국선 변호인이 선임됐지만 무성의한 응대에 더욱 힘이 빠졌다”고 했다.
“조사를 받으면서도 경찰이 저를 꽃뱀으로 의심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어요. 참고인 조사를 받으러 경찰서에 간 남직원들은 모두 A씨와 친한 사이였고, A씨 부탁을 받았는지 모두 ‘그런 일이 없었다’거나 ‘걔가 오버하는거다’라고 하더군요. 경찰은 이런 진술을 별 다른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거 같았습니다.”
김씨가 불안감에 떨고 있는 동안 사건은 검찰에 송치됐고, 여검사에게 배당됐다. 김씨는 그제야 마음 편히 조사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여검사님이 경찰에 재수사를 지시하고 사건 담당 경찰관도 교체해서 원활한 조사가 이뤄질 수 있도록 배려해줬어요. 국선변호인도 다시 선정해 줬고요.”
검찰은 진술 증거 등을 보강해 A씨를 재판에 넘겼다. 재판부는 두 차례 공판을 거쳐 A씨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8일 현재 A씨는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고, 김씨는 다른 일을 하고 있다. 김씨는 “그동안 너무 힘들었다”며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신고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법으로 치유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죠.”
法 “피해자 돕는 동료도 보호”
김씨가 2년간 직장 내 성추행 피해를 입는 동안 그를 도와준 동료 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A씨는 전근을 간 이후에도 김씨가 근무하는 곳에 찾아와 다른 직원들과 웃고 떠들었다고 한다. 김씨를 소외시키는 분위기를 조성한 것이다.
김씨가 겪은 일은 성추행이 벌어진 직장에서 흔히 나타나는 전형적인 상황이다. 수사기관의 무성의함도 마찬가지다. 회사의 퇴사 권유나 수사기관의 안일한 조사에 김씨가 적극 대처하지 않았다면 법의 도움을 받기 어려웠을 수 있다.
법원은 최근 성추행 피해자를 돕는 동료에게 부당한 인사 조치가 있을 경우 회사가 손해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는 판례를 새롭게 제시했다.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지난해 12월 르노삼성 여직원 최모씨가 회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성추행 피해자를 도와준 직원에게 정당한 사유 없이 인사 발령 등의 부당 조치가 이뤄졌을 경우 사업주에게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사업주의 부당한 조치로 인해 피해자는 스스로 구제절차를 포기하거나 단념하라는 압박을 느낄 수 있고, 직장 내에서 사실상 고립되는 처지에 놓일 수 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 일러스트=이은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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