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은 민심이 궁금했다. 정부는 소통을 원했다. 억울한 사연은 들어주고 부당한 사건은 바로잡고 필요한 제도는 마련해주고자 했다. 정부는 고민 끝에 큰 마음을 먹었다. ‘국민청원 게시판’을 만들었다.
최근 그 곳을 방문해본 사람들은 “놀이터냐”고 묻는다. 장난 섞인 글, 조롱이 가득한 내용, 황당하게 느껴지는 주장이 잇따르고 있다. 하지만 여러 번 곱씹어야 할 진중한 의견, 정곡을 찌르는 시각도 많다. 이 때문에 지금 국민청원 게시판은 ‘뜨거운 감자’가 됐다. 문재인정부가 한껏 펼쳐놓은 소통의 장. 그것이 어떤 위상을 갖고 어떻게 활용될지는 이제 참여자들의 몫이 됐다.
◇ 장난·조롱 글 무성… “이곳은 놀이터가 아닙니다”
국민청원 게시판은 국민 누구나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청와대는 청원글이 올라온 뒤 30일 동안 20만명 이상이 추천할 경우 청와대나 정부 관계자가 직접 답한다는 원칙을 세워놨다.
이런 공간에 황당하고 억지스러운 청원도 다수 올라와 있다. “뭐만 하면 국민청원이냐”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지난해 11월 16일 전국의 고3 수험생 전원에게 치킨을 사 달라는 청원이 올라왔다. 이날은 원래 ‘2018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실시될 계획이었지만 지진 여파로 사상 처음 수능이 연기됐던 날이다.
이밖에도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의 군 입대를 면제해 달라는 청원부터 “너도 나도 롱패딩을 입으니 눈꼴 시리다”며 ‘롱패딩 착의 규제법’을 제안하는 경우까지 있다. 심지어 ‘군대 내 위안부를 설치해 달라’는 조롱성 청원도 등장했다. 걸그룹 ‘아이오아이’ 재결합을 청원키도 하고 커플에게 데이트 비용을 달라는 글도 있다.
◇ 전례 없는 소통창구, 대화 문턱 낮춘 청와대
당연히 ‘좋은 예’도 많다. 과거 정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 아파트 단지 내에서 차에 치여 사망한 어린이 사연이 알려지자 청원이 봇물을 이루었다. 도로교통법이 잘못돼 아이를 친 운전자에게 미미한 처벌이 돌아가는 것을 알고는 ‘해당 법을 개정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현재 20만명 이상이 투표해 청와대 답변을 기다리는 중이다.
‘조두순 출소 반대’ ‘낙태죄 폐지’ ‘주취감형 폐지’ 등은 청와대 핵심 관계자로부터 답변이 완료된 상태다. 현재 답변 대기 상태인 국민청원은 ▲가상화폐 규제 반대 ▲나경원 평창올림픽 파면 ▲미성년자 성폭행 종신형 ▲초·중·고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 등이다.
◇ 악용 가능성 열려 있다… 여론 조작 위험도
여러 장·단점 중에 “여론을 조작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 최근 크게 두드러졌다. 일부 사용자가 익명 뒤에 숨어 클릭 수를 조작, 청와대 답변을 끌어내려 시도한 흔적이 포착됐기 때문이다.
6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20만 쉽게 넘어 정부 답변 얻는 법’이란 내용의 게시물이 올라왔다. 그 중 한 가지는 트위터 가입을 무한히 하면 청원 동의도 무한히 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최근 카카오톡 중복투표가 도마에 오른 적 있다. ‘초·중·고 학교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를 주장하는 청원은 최근 20만명 이상의 선택을 받았다. 하지만 마감 당일 10만명이 몰려 중복투표 의혹이 제기됐다. 청와대도 심각성을 인식하고 카카오톡을 통한 청원서비스를 잠정 중단했다.
청와대 청원게시판은 누구나 익명으로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할 수 있게 설계돼 있다. 가입절차도 필요 없다.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 없으니 어떤 식의 게시물을 얼마나 많이 올리는지 통제할 수도 없다. 익명성의 장점을 악용하려는 이들이 등장하면서 이 오히려 단점으로 기능할 위험에 노출돼버린 것이다.
◇ 포기할 수 없는 청원 게시판… 보완·개선 필요
장난과 조롱 청원을 제외하면 국민청원 게시판은 한국인이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소통의 기능을 하고 있다. 진짜 민심을 읽을 수 있게 해준다. 실제로 이뤄지기 힘든 약간은 억지스러운 주장일지라도 누군가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동질감, 정부가 나서서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안도감을 얻게 해준다. 이 자체로도 순기능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석방되자 집행유예를 선고한 정형식 판사의 파면을 요구하는 청원글이 올라왔다. 20만명 이상 투표를 받는다 할지라도 사실상 현직 판사를 파면하기란 불가능하다. 이 사실을 투표 참여자가 모를리 없다. 하지만 이 경우 법적 실효성이 없더라도 정부와 대통령이 그런 국민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게 된다는 것 자체로도 훌륭한 소통이 될 수 있다. ‘판결을 납득하지 못하는 국민이 많다’는 사실을 국민이 청와대에 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기능 때문이라도 국민청원 게시판을 지키고 가꿔야 할 필요는 충분하다. 그러려면 오용과 악용을 막기 위해 기술적인 개선과 보완을 해야 한다. 먼저 중복투표 기능을 없애는 것이 중요하다. 1인 1표로 여론 조작 우려를 차단해야 게시판의 여론이 신뢰도를 높일 수 있다. 또 자주 올라오는 청원을 카테고리화해 비슷한 안건을 합치는 방안도 검토할 만하다. 이밖에 ‘청원 신고 기능’을 요구하는 이들도 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
GoodNews paper Ϻ(www.kmib.co.kr), , , AI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