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가 23일 오전 8시4분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1세. 일본 정부에게 공식 사과와 정당한 배상을 받는 게 소원이었던 할머니는 끝내 사과 받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이로써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는 37명만 남게 됐다.
김 할머니는 1926년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나 10대 부모님을 여의고 친척 집에서 지냈다. 그러다 17살이 되던 해 일본군에 의해 중국 지린성 훈춘 위안소로 강제 동원됐다. 수차례 탈출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때마다 구타를 당했고 결국 왼쪽 고막이 터졌다. 그 후로 할머니는 평생 왼쪽의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3년간 위안부에 붙들려 있으며 7번의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김 할머니는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김 할머니는 함경북도 성진으로 가 두만강을 넘었다. 함께 강을 넘던 친구 1명이 강물에 떠내려가 죽는 것도 지켜봤다. 할머니는 2007년 2월 마이크 혼다 미국 연방하원 주최로 미국 의회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청문회에 참석해 “해방 후 38일을 걸어 조국에 돌아왔다”며 “위안소에서 하루 40여 명을 상대해야 했고, 죽지 않은 만큼 맞아 고막이 터졌다”고 증언했다.
죽을 고비 끝에 고향에 돌아와 위안소에 끌려가기 전에 결혼을 약속했던 남자와 같이 살았지만 남자는 얼마 후 먼저 숨졌다. 어린 아이도 5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로 한참을 혼자 살다 1998년 나눔의 집으로 왔다.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정당한 배상을 바랐던 할머니는 “짓밟힌 내 삶이 불쌍하고 억울해서라도 ‘내가 살아있는 한’ 사과를 받아내야 합니다”라며 매주 수요 집회에 나가 위안부의 참담한 실상을 알렸다. 나눔의집에 기거하면서 할머니는 한국 정부로부터 받은 배상금 등을 모아 아름다운 재단에 1억원, 나눔의 집에 1000만원, 퇴촌 성당에 학생들 장학금으로 1억5000만원 등을 기부한 바 있다. 일본에게서 공식 사과와 배상을 받으면 이 또한 기부할 생각이었다.
빈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차병원 지하 1층 특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25일, 장지는 나눔의 집 추모공원이다. 김 할머니의 별세로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39명 가운데 생존자는 37명으로 줄었다.
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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