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의 가족(家族) 문화에서 가족의 대를 잇는 장자(長子)역할은 특별하다. 이용찬의 근대희곡은 1957년 제 1회 국립극장 장막 희곡에 당선되어 이듬해 국립극단의 의해 시공관(옛 명동예술극장)에서 초연된 작품이다.

이용찬 작가가 투영한 가족은 어두운 역사의 터널을 뚫고 해방을 거치고 한국전쟁 파편들을 피하며 가족을 품으로 안고 뛰며 달려온 가족의 비극적 개인사가 아니라 한국사회 가부장적 혈연사회로 튀어나온 가족의 심지(心志)다. 구태환 연출은 이용찬이 투영한 가족의 심지를 들고 동시대 가족으로 재 점화시켰다. 근대희곡 활자로 봉인 된 60년을 살아온 박씨 가족사를 오늘날 한국사회 가족의 품으로 스며들게 한다.
이번 공연에서는 근대극 언어의 결을 투박하지 않게 살려낸 백하룡 작가의 윤색된 작품과 그 언어의 결을 따라가는 배우들의 노련한 표현의 활기와 인물의 심리묘사를 탁월하게 그려내는 구태환 연출의 섬세함이 돋보였다. 무대는 화려한 치장이나 장면전환을 위한 배려나 도구는 없다. 극장 무대 바닥에서 45도 정도 비스듬히 올려 세워진 미니멀한 비사실적 가옥(家屋) 한 채가 전부다. 동시대 가족들 삶에서 터져 올라오는 빛들을 비추며 작은 아파트 한 채가 누워있는 구조다.
구태환의 가족은 1950년대를 지나 오늘날의 삶의 주거문화를 동시에 투영하는 가옥 위에서 살아간다. 오늘을 살아가는 가족들로 무대를 상징적으로 배치하는 무대미술가 박동우의 ‘가옥’은 돋보인다. 연출은 그 위를 밟고 지탱하며 국립극단 ‘근현대극의 재발견’에 강한 삶의 발자국을 남긴다.
죽음의 진실게임
해방 전 막대한 재산을 형성한 극중 인물 박기철(김정호 분) 가족 얘기를 해보자. 박기철은 2남 1녀를 뒀다. 한 때 돈의 권력으로 막대한 재산을 가진 박기철은 물질적 욕망에서 권력을 향한 정치적 욕망으로 변주된다. 해방 후 대한민국 첫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두 번 낙선하면서 물질적 풍요와 정치적 욕망은 몰락하게 된다. 이어 6,25 전쟁이 터지고 인민해방군에 의해 박기철의 재산은 친일파 재산으로 몰수당한다.

당시 미국 유학을 꿈꾸는 박기철의 둘째 아들 박종수(홍아론 분)은 인민군들에게 끌려가 실종된다. 맏이인 박종달은(이기돈 분) 사실상 박씨(박기철) 집안에 외아들이자 장자로 처리된다. 박종달은 가부장적인 아버지 권위에 도전하지 못한다. 욕망은 거세되고 내면상태는 병적인 불안감으로 증폭된다.
동생 박종수(홍아론 분)나, 박애리(정새별 분)와는 다르게 박씨 집안의 장자인 박종달의 삶과 꿈, 결혼도 아버지에 의해 선택되어온 삶과 가족사는 오늘날 달라진 것이 없다. 미국유학 선호주의, 아버지와 장자의 내면적 갈등과 세대의 갈등, 대한민국 사회에서 맏이로 살아가는 심리적 불안성과 책임감, 아들선호현상, 장자우선주의 가계도는 여전히 주변 삶이고 우리 가족의 이야기다.
구태환의 시퀀스
우선 무대를 1950년대 통로를 지나 박기철 가족의 삶을 오늘로 연결한 미니멀한 상징적 무대배치가 신선했다. 무대배치와 연출의 시선이 겉돌 수 있지만 연출은 무대의 상징적 특수성을 구태환 연출방식으로 조립하고 디자인해 간결하게 압축한다. 근대극 언어의 결과 맛을 살려내는 표현의 구도, 공허하고 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무대를 박종달을 중심으로 인물의 심리와 갈등의 불안전한 내면성을 소리의 리듬으로 증폭시키고 심리적 상태의 볼륨을 긴장감 있게 조절한다. 리듬감은 인물내면의 언어를 형성한다. 박종달 내면의 혈전된 불안전한 심리상태는 음향으로 ‘쿵쾅쿵쾅’ 거리며 무대공간을 압도하고 증폭시키고 있는 내면의 소리는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긴장감으로 시선을 조여 온다.

프롤로그와 1막까지는 박기철의 심장마비 돌연사와 고리대금업자 임봉우의 죽음의 수수께끼를 풀기위한 전개과정이다. 박기철의 몰락, 6,25 전쟁통과 남동생 박동수의 죽음과 실종, 억눌려 자라온 박종달의 심리적 내면성과 대학시절 최연희(우정원 분)와의 사랑과 이별, 선택된 결혼으로 인한 불안전한 내면의 욕망과 과거 삶은 플레시백으로 장면을 교차시키며 시공간을 움직인다. 평행선을 달리던 극은 2막에 들어서부터다. 고리대금업자 임봉우를 우발적 죽음으로 내몬 사건이 펼쳐지고 박종달의 광기의 절규가 쏟아지는 장면에서 구태환 연출은 승부수를 걸고 극적템포로 반격을 가한다.
한 장면이다. 박종달은 아버지가 고리대금업자 임봉우에게 빛 독촉으로 굴욕당하는 상황을 목격한다. 이어지는 당일에 일어난 우발적 범행의 상황이 펼쳐지고 박종달 회상으로 플레시백 되어 펼쳐지는 극적인 절규와 내면의 불안한 광기를 쓸어 담아내는 이 장면의 시퀀스는 연기, 공간배치, 음악, 장면의 구도, 인물 심리묘사의 탁월함은 구태환 연출미학으로 압축된다.
이 장면에서 45도 경사로 누워 있던 가옥의 무대는 박종달의 불안한 심리를 따라 수직으로 일어선다. 가옥이 수평에서 수직으로의 이동은 박종달 개인의 욕망은 아버지에 의해 거세된 채 심리적 억압을 받으며 살아왔던 억눌린 욕망의 변화다. 파괴된 박종달 내면의 불안전성은 박종달의 삶이 수직으로 이동되면서 비로소 혈전된 욕망을 덜어낼 수 있다.
연출은 당시 상황을 회상으로 재현 하면서 절규하는 박종달의 불안한 광기의 내면을 음악적 리듬으로 공간을 채우고 인물의 절규와 광기의 불안정성을 마치 영상을 바라보는 몽환성으로 장면으로 배치한다. 장자의 혈전된 고뇌, 아버지와 아들의 심리적인 갈등, 우발적 살인의 불안함, 죽음의 누명에서 아버지를 지켜내려는 장자의 불안성과 혈연적 관계, 장자로 태어나 개인의 욕망을 거세당한 혈연의 굴레에서 터져 나오는 희생성과 맏아들로 살아가는 고뇌와 심리적인 불안감, 비극적 혈연의 숙명을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심리적 내면으로 그려냈다.

1950년대 박씨 가족이 살았던 언어의 결을 배우들은 간결하게 살려내면서 웃음의 포인트를 놓치지 않는 박완규는 인물의 캐릭터와 이완된 거리감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재치로 극에 활력을 넣었다. 배우 김정호는 권위적인 아버지와 정치적인 욕망, 막대한 재산을 탕진해 빛에 허덕이면서도 마지막 남은 작은 가옥 한 채 재산을 맏아들에게 물려주고 박씨 집안을 지키려는 고단한 연민과 품의를 잃지 않으려는 한국사회 아버지의 고뇌와 내면을 그려냈다. 배우 이기돈은 인물(박종달)의 고뇌와 불안감을 묵직하게 표현하고 극을 지탱했다. 박기철의 아내로 분한 배우 박현미와 배우 김정한 (고리대금업자)도 구태환 연출의 ‘가족’ 과 무대미술가 박동우 ‘가옥’을 노련한 연기로 받쳤다.
국립극단에서는 6월18일까지 국내 대표적인 연출가 오태석의 한국적인 ‘로미오와 줄리엣’을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하고 있다. 볼만한 연극이다.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공연예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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