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월말부터 2월초 사이 영국 연극계에선 영향력있는 극작가 데이비드 해어의 발언이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해어는 극작가이자 연극사학자인 제프리 스위트와의 인터뷰에서 “유럽의 개념(concept) 중심 연출가들이 고전을 난도질함으로써 영국의 전통적인 연극성을 손상한다”고 말했다. 심지어 그는 유럽 연출가들(해어의 표현으로는 ‘theatre makers')이 텍스트 중심의 영국 연극을 ‘감염시킨다’고 표현했다. 그가 꼽은 대표적인 연출가는 영국에서 인기가 높은 벨기에 연출가 이보 반 호프였다.
이보 반 호프는 최근 국립극단(NT), 바비칸 센터, 영빅 시어터 등 영국 연극계를 이끄는 주요 극장들의 러브콜을 한몸에 받고 있다. 매 시즌 이들 극장마다 그가 연출한 작품이 빠지는 경우가 없다. 지난해 12월 ‘헤다 가블러’를 공연한 NT는 내년 1월 ‘네트워크’를 선보일 예정이다. 또 바비칸센터는 3월에 그의 대표작 ‘로마 비극들’을 7년만에 공연하는데 이어 4월 주드 로 주연의 신작 ‘강박관념’을 제작한다. 또 웨스트엔드에서는 데이비드 보위의 음악으로 만든 뮤지컬 ‘라자루스’가 무대에 올랐다.
1981년 자신이 쓴 작품을 직접 무대에 올리면서 연극을 시작한 그는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대표적 극단을 두루 거치면서 성장했다. 2001년부터는 네덜란드 최대의 레퍼토리 극단인 토닐그룹 암스테르담(TA)의 예술감독으로 재직중이다. 2006년 ‘코리올레이너스’ ‘줄리어스 시저’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등 셰익스피어의 3개 작품을 엮어 만든 ‘로마 비극들’은 당시 유럽 평단과 대중의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며 그를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사실 이보 반 호프는 현재 세계 연극계의 수퍼스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2014년 영국 영빅시어터에서 초연한 아서 밀러 원작의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으로 2015년 올리비에상과 2016년 토니상 연극 부문 작품상과 연출상을 휩쓸었다. 세계적인 공연장과 페스티벌이 그를 초청했거나 초청하기 위해 줄을 서 있을 정도다. 오죽하면 지난해 영국 신문 가디언은 “어디를 가도 이보 반 호브가 있다”고 평했으며, 미국 신문 LA타임즈는 “이보 반 호브를 만나라. 그는 지금 가장 빛나는 연출가다”라는 찬사를 보냈다.
가디언이 4월 발매 예정인 스위트의 책 가운데 해어의 발언을 보도한 이후 평론가 린 가드너, 영빅 시어터 예술감독 데이비드 란 등 연극 관계자들은 앞다퉈 해어를 비판하고 나섰다. 이들은 오히려 유럽 연출가들의 참신한 시도가 영국 연극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나아가 해어가 주장한 ‘감염’은 유럽 연극의 지성주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영국의) 감상적인 민족주의와 외국인 혐오증에서 나온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연극 팬을 자처하는 독자들까지 가세했던 이 논란은 해어가 특별한 반박을 하지 않으면서 잠잠해졌다. 그러나 현대 연극계에서 득세하고 있는 ‘연출가 중심 연극’에 대한 극작가의 두려움을 보여주는 사례로 보인다.

그동안 이보 반 호프가 다양한 스펙트럼의 작품들을 선보여 왔지만 대체적으로 원작의 해체 또는 재창작,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갖게 되는 현대성과 동시대성, 영화적 기법을 도입하여 인물의 심리상태를 최대한 부각하는 연극적 특징을 보인다. 특히 여러 작품에서 사용되고 있는 카메라 기법은 단순히 배우를 가깝게 비추어 화면에 투사하는 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로 하여금 인물이 처한 내면의 갈등과 긴박감을 느끼며 보다 더 극에 몰입하게 만든다.
그가 TA와 함께 2012년 ‘오프닝 나이트’에 이어 ‘파운틴헤드’로 두 번째 내한 무대를 가진다. 2012년엔 스케줄 때문에 직접 오지는 못했지만 이번에는 연출가로서 TA와 함께 올 예정이다.
31일~4월 2일 LG아트센터 무대에 오르는 ‘파운틴헤드’는 구 소련 출신으로 미국으로 망명한 작가 아인 랜드가 1943년 천재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모델로 해서 발표한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1920~3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이상을 추구한 건축가 하워드 로크의 이야기는 창작의 본질, 예술적 진정성, 개인의 자유의지 등 수많은 철학적 질문들과 마주하도록 만든다.
이보 반 호프는 무려 70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원작을 단숨에 읽을 만큼 매료돼 바로 연극화를 결심했다. 2014년 초연된 연극은 이보 반 호프의 연출, 배우들의 밀도 높은 연기, 비디오 아티스트와 라이브 뮤지션까지 참가한 압도적인 앙상블로 4시간의 러닝타임을 짧게 만든다는 평가를 받았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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