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26일 자정이 다 된 시각.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는 소프라노 임세경(42)에게 현지 소속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1월 31일과 2월 3일 오스트리아 빈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극장)에서 플라시도 도밍고가 지휘하는 ‘토스카’에 대타 출연 가능 여부를 묻는 내용이었다.
푸치니의 ‘토스카’는 세계에서 자주 공연되는 인기 오페라 가운데 하나. 토스카 역은 극적이면서도 서정적인 음색과 힘찬 고음을 가진 리릭 스핀토 소프라노라면 누구나 탐내는 역할이다. 게다가 세계에서 손꼽히는 오페라극장인 빈 슈타츠오퍼라면 더더욱 놓치기 어려운 기회다.
하지만 지난 2011년 서울시오페라단의 ‘토스카’에서 두 차례 공연한 게 전부였던 그는 망설일 수 밖에 없었다. 최근 유럽 무대에서 주로 출연했던 ‘아이다’와 ‘나비부인’의 대타라면 언제든 가능하지만 ‘토스카’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이틑날 아침 소속사는 물론 도미니크 메이어 빈 슈타츠오퍼 총감독으로부터 “빈으로 당장 와줬으면 좋겠다”는 연락을 받은 그는 짐을 쌌다. 그리고 겨우 3일간 리허설을 한 뒤 1월 31일 저녁 무대에 섰다. 이날 공연의 경우 조금은 아쉬움이 있었지만 2월 3일 공연은 현지 언론으로부터 찬사를 받을 정도로 만족스럽게 끝냈다.
열흘 뒤인 지난 2월 13일 아침 밀라노에서 짐을 싸 서울로 오려던 그에게 소속사와 헝가리 부다페스트 오페라극장 예술감독에게 전화가 왔다. 컨디션 난조에 빠진 주역 소프라노를 대신해 오페라 ‘나비부인’에 출연해 달라는 것이었다. “말도 안된다”며 거절했지만 최고의 대우를 약속하며 사정하는 바람에 결국은 부랴부랴 비행기를 타고 날아갔다. 2시간만에 동선 등을 연습한 뒤 무대에 올랐지만 그는 기립박수를 이끌어냈다.
오는 4월 6~9일 국립오페라단의 ‘팔리아치’와 ‘외투’의 주역을 맡아 서울에 온 그와 27일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유럽 오페라 무대에서 동양 소프라노가 ‘토스카’ 배역을 맡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를 선택한 빈 슈타츠 오퍼 총감독님의 모험에 보답하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게다가 동양인 소프라노라는 한계 때문에 ‘아이다’와 ‘나비부인’을 자주 하면서 레퍼토리 확대에 대한 갈급증이 컸었다. 그런데, 이번에 빈 슈타츠오퍼 공연을 통해 내 대표 레퍼토리로 ‘토스카’가 추가된 것은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명실공히 세계 오페라계의 황제인 도밍고와의 작업도 그에겐 큰 의미였다. 그는 “도밍고 선생님은 나를 처음에 봤을 땐 잘 할 수 있을지 의심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그런데, 점점 내 소리가 좋다고 칭찬하시더니 이런저런 조언도 해주셨다”면서 “스카르피아 역의 바리톤 마르코 브라토냐가 컨디션 조절을 위해 연습에 불참하자 도밍고 선생님이 직접 노래를 부르며 나와 호흡을 맞춰 주셨다. 정말 감동적인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2014-2015시즌 ‘나비부인’의 주역으로 빈 슈타츠오퍼에서 데뷔해 호평받은 바 있다. 이후 빈 슈타츠오퍼는 2015-2016시즌 ‘나비부인’과 ‘라보엠’의 소프라노가 출연이 어려울 때 그를 찾았다. 그는 프로 무대에선 한번도 서지 않았던 ‘라보엠’은 거절했지만 ‘나비부인’은 바로 응낙했다.
그는 “내가 아직 스타가 아니기 때문에 빈 슈타츠오퍼에서 시즌 개막부터 주역으로 선 것은 2015년 1월 ‘나비부인’ 뿐이었다. 하지만 나를 믿기 때문에 대타라도 이렇게 계속 주역을 제안하는 것인 만큼 감사하고 기쁘다”면서 “2005년 홍혜경 선생님이 라스칼라 극장에서 ‘라보엠’의 미미를 하실 때 라스칼라 극장에서 전문연주자 과정에 있던 내가 커버였다. 하지만 제대로 프로 데뷔를 하지 않았던 미미 역으로 빈 슈타츠오퍼의 제안은 차마 받아들이지 못하겠더라”며 웃었다. 이어 “대타든 아니든 그동안 출연했던 극장과 페스티벌에선 반드시 나를 다시 캐스팅했다”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이날 그는 올해 아레나 디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의 ‘아이다’와 ‘나비부인’의 두 작품에 캐스팅 됐다는 소식을 처음으로 밝혔다. 2015년 그는 아레나 디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의 간판 레퍼토리인 ‘아이다’의 첫 한국인 주역이라는 영예를 얻은 바 있다.
세계 오페라 팬들의 성지로 불리는 아레나 디 베로나 페스티벌은 이탈리아 북부 베로나의 로마시대 원형경기장(1만5000석)에서 매년 여름 열린다. 104년째인 올해는 6월 23일부터 8월 27일까지 6개의 오페라, 2개의 갈라 콘서트, 1개의 발레 갈라 프로그램이 선보여진다.
그는 “2015년엔 오디션을 거쳐 단 1회 출연했을 뿐이다. 지난해엔 ‘아이다’와 ‘일트로바토레’에 9회 출연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스위스 아방쉬 페스티벌(6월 30일∼7월 15일)의 ‘나비부인’과 출연 계약을 했기 때문에 올해로 미뤘었다”고 전했다. 이어 “사실 이번에 ‘토스카’에서 나를 좋게 본 도밍고 선생님이 5~9월 ‘아이다’의 세계 야외 경기장 투어 공연에 출연해달라고 제안하셨다. 아레나 디 베로나 페스티벌과 일정이 다소 겹치는 바람에 포기해야 했지만 도밍고 선생님께서 조만간 다른 작품에서 만나자는 이야기를 하셨다”고 덧붙였다.
그는 2017-2018시즌엔 더 바빠질 전망이다. 독일 라이프치히 오페라극장 드레스덴 젬퍼 오페라극장, 스페인 라스팔마스 오페라극장, 일본 신국립극장, 핀란드 사볼린나 오페라 페스티벌 등에서 ‘아이다’ ‘나비부인’ ‘운명의 힘’ 등의 주역으로 출연이 확정된 상태다. 그는 “소프라노로서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런던 로열오페라, 파리 국립오페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도 꼭 서고 싶다. 그리고 ‘마농 레스코’ ‘라보엠’ 등 하고 싶은 작품의 배역도 많다”고 미소지었다.
탁월한 가창력과 열정적인 연기로 무장한 그는 뚜벅뚜벅 세계 정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