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벌어진 북한 김정은 노동당위원장 이복형 김정남 피살 사건으로 북한의 외교적 고립이 심화되고 있다.
국제사회의 전방위 제재 속에 유일한 숨구멍 역할을 했던 동남아시아 국가들까지 북한에 등을 돌리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이 붐비는 국제공항에서 가공할 화학무기 VX로 김정남을 암살한 것에 분노한 말레이시아 정부는 40년 넘게 이어온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재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
◇동남아서 반북 정서 고조=그동안 북한은 핵실험에 따른 UN의 제재를 피해 동남아 국가들과 교류를 넓혔고, 우호적인 동남아를 거점으로 외화벌이 활동을 벌였다.
당사국인 말레이시아는 북한의 몇 안 되는 우방국이자 북한인이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다. 현재 북한인 약 1000명이 말레이시아에 거주하면서 일하고 있고, 그들이 송금하는 돈은 김정은 정권의 주요한 외화수입원이다.
40여년 지속된 양국의 우호관계는 김정은 시대에도 순항하는 듯했지만 김일성 손자들의 골육상쟁으로 위기를 맞고 있다.
말레이시아 외교부는 지난 20일 강철 북한 대사를 초치하고, 북한 주재 자국 대사를 소환했다. 용의자 11명 중 최소 8명이 북한 국적자로 파악된 가운데 말레이 경찰은 지난 22일 2차 수사결과 기자회견에서 추가로 확인한 용의자 가운데 현광성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대사관 2등 서기관이 포함됐다고 발표하면서 사태는 한층 악화됐다.
반면 북한 정부와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 대사관은 말레이시아 당국의 능력을 폄하하고 비난하고 있다. 강 대사가 지난 20일 대사관 정문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말레이시아가 우리를 해하려는 세력과 결탁했다”고 주장했고, 북한 대사관은 22일 말레이 경찰 2차 수사 기자회견 발표내용을 부인하면서 “북한주권에 극도의 모욕”이라고 주장했다.
22일 뉴스트레이츠타임스에 따르면 말레이시아 연간 대외무역규모인 1조5000억 링깃(약 385조200억원) 중 북한과의 무역량은 0.002%에도 못 미치는 2300만 링깃(약 59억364만원)에 불과하다.
말레이시아 국제전략 및 국제문제 연구소 샤흐리먼 록먼 수석 연구원은 “북한과의 무비자협정으로 말레이시아가 얻는 이익은 투자비용에 비해 미미하다”며 “북한과의 교역량이 증가할 가능성도 없다”고 분석했다. 북한과의 비자면제협정을 폐기해도 말레이시아의 피해는 없다는 이야기이다. 말레이시아 안팎에서는 북한과의 단교설까지 나오고 있다.
이번 사건으로 말레이시아 외에 다른 동남아 국가의 우려와 분노도 들끓고 있다. 인도네시아 경찰 당국은 간첩 활동의 온상으로 지목된 자카르타 중심부 북한 식당을 조사하기로 했다.
태국 일간지 방콕포스트는 22일 ‘용납할 수 없는 북한’이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북한 공작원들이 또 동남아에서 긴장과 분노를 유발했다”고 비난했다. 신문은 “김씨 왕조의 형제, 왕족 살해라는 범죄가 평양을 벗어나 해외까지 뻗치면서 아세안국가들이 뒷처리를 해야 될 상황”이라면서 “태국과 아세안 국가는 일말의 법치도 거부하는 북한에 추가조치를 고려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 중국 혐북정서도 급증= 2013년 처형된 장성택과 함께 대표적인 친중파로 꼽히던 김정남 피살에 중국 정부가 느끼는 충격은 상당한 것으로 예상된다.
김정은이든, 김정남이든 중국 지도부가 특별히 지지하는 상대는 없지만 골육상쟁으로 한반도 정세가 불안에 빠지고, 이를 계기로 한·미·일 군사동맹이 강화되는 것은 중국이 원치 않는 일이다.
게다가 김정은은 집권 이후 북중관계를 소원하게 만든 반면 김정남은 북한의 개혁개방을 찬성했다. 중국의 입장에서 김정남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김정남 피살에 따른 북한 내 돌발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중국은 즉각 북·중 접경 지역에 병력 1000명을 추가 배치한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 당국이 내놓은 반응은 “말레이시아 당국의 수사를 보고 있다”가 전부지만 다수의 언론과 전문가는 “고집대로 행동하는 김정은에게 중국 정부의 피로감은 급증하고 고민도 깊어지고 있다”고 본다.
홍콩 언론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외교 소식통을 인용해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로 관계가 미묘한 시점에 터진 김정남 피살 사건이 중국을 진퇴양난으로 몰아넣었다고 주장했다.
특히 지난 19일부터 시작된 북한산 석탄 전면 금수 조치와 관련해 정부 당국이 공식적으로 김정남 피살과 무관하고 주장해도 결국 대북 경고 메시지로 볼 수 있다. 김정남의 후견인이나 다름없었던 장성택이 총살당하자 2014년 북·중 교역량이 2000년 들어 처음으로 줄어들 정도로 북·중 관계가 2년여 가까이 냉각됐던 전례가 되풀이될 수 있다.
카네기-칭화 글로벌 정책센터 자오퉁 연구원은 “암살사건 배후가 북한으로 밝혀지면 중국 정부는 김정은 정권에 크게 실망해 대북 정책을 변화시킬 것이며 평양과의 대화를 포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량윈샹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 교수도 “김정남 피살로 미국과 국제사회의 대북 반감이 커지면서 동아시아 정세가 더욱 긴장될 수 있다”며 “미국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대북제재의 이유를 찾은 만큼 중국은 더욱 피동적이 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중국 정치 평론가인 장리판은 “김정남의 사망은 중국의 정부의 큰 손실이며 수년동안 투자가 물거품이 된 것”이라면서 “북한과의 협상에서 중요한 카드인 김정남을 잃으면서 중국이 김씨 왕조를 저지할 가능성은 크게 줄었다”고 분석했다.
김정남 암살사건 이후 중국 내 대북 여론도 악화돼 SNS에서는 김정은을 희화화와 패러디 콘텐츠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에 개설된 ‘김정남 살해’라는 주제의 이슈방에는 지난 21일 기준 약 2억1000건의 조회수에 6만2000여 건의 댓글이 달렸으며 팔로어도 2만3000명에 달한다.
네티즌들은 “현대 문명사회에서 암살자와 전통적인 우의를 이야기하는 것은 중국을 불리하게 할 것” “정부의 북한산 석탄수입 중단을 보면 말레이시아에서 숨진 북한인이 김정남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적을 제거하는 것은 독재자의 유일한 선택이다”라는 의견을 게재했다.
뉴시스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수집,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