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도 실력이야. 돈 없는 너희 부모를 원망해라.”
맞춤법도 제대로 모르면서 명문여대에 다니던 그녀의 한마디는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다. 필자도 지난 두 달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혼돈을 겪었는데 내신에서 한 개 더 맞히려고, 수학능력 시험에서 1점이라도 더 따려고 밤잠을 못 자던 우리 아이들의 분노와 허탈감은 오죽했으랴. 그래서인지 촛불 집회에는 청소년들이 유난히 많았다.
언제부턴가 진료실을 찾는 아이 부모들의 주된 호소가 “아이가 무기력해요”인 경우가 많다. 물론 청소년 뿐 아니라 초등학생들까지도.
부모가 학원을 가라고 하면 가기는 하지만 아이는 별반 공부에도 관심이 없고, 책상에 앉아 있기는 하지만 집중하지 못한다.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다. 놀 시간이 주어져도 딱히 놀 줄도 모른다. 하지만 하루 학원 스케줄은 늘 꽉 차있다.
이런 생활이 초등학교 아니 유치원 시기부터 계속된다. 얼마 전 신문에 ‘우리나라 중학생들이 학원 때문에 저녁을 제시간에 못 먹고, 잠을 새벽 3시에나 잔다’라는 기사가 보도된 적이 있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데 그들에게 어떤 보상이 주어지는가?
중학교 때에는 누구나 특목고라는 좁은 문을 향해 같은 방향을 일치단결(?)해 뛰어 간다. 하지만 그 관문을 통과하는 사람은 그 중 극소수다. 일단 통과하는 사람은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고 좋아하지만 그것도 잠깐. 거기엔 더 치열한 경쟁이 기다리고 있다.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거나 근처에도 못가 본 아이들은 벌써부터 낙오자가 된다. 특목고 실패 후 패배감과 상실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우울증이나 심하게는 정신질환을 앓게 되어 찾아오는 아이들도 임상에서 매우 흔하게 본다.
여러 관문을 운좋게 잘 통과한 아이들은 어떠한가? 피눈물나는 노력 끝에 원하는 대학에 갔다고 하더라도 취업의 관문은 더욱 높다. 그 어려운 취업에 성공하고도 비인간적인 대접에 실망, 1년 만에 퇴사하는 엘리트 신입 사원이 30%라고 한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달려왔는지 허탈하기 그지 없다.
전후 세대인 우리의 부모들은 배를 곯는 어린 시절을 보내긴 했으나 ‘개천에서 용이 날’ 기회 또한 많았다. 치열한 경쟁을 겪긴 했지만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어떤가? 경쟁에서 처진 아이들은 그들대로, 경쟁에서 이긴 아이들은 그들대로 희망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심리학자 셀리그만의 유명한 실험이 있다. 24마리 개를 방에 가두어 놓고 혐오스런 전기 자극을 반복해서 주었다. 처음엔 개들이 방에서 탈출하기 위해 날뛰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탈출하기 위한 모든 행동을 포기했다. 뛰어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배운거다.
그는 이런 심리현상을 ‘학습된 무기력감(learned helplessness)’이라고 명명했다. 우리 사회가 아이들을 탈출 할 수 없는 방안에 가둬 놓고 뜨거운 전기 고문하고 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아이들이 무기력해 지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인 듯하다. 그 시기가 언제 오는지의 차이가 있을 뿐. 이런 젊은이들의 집단적인 상태를 우리나라의 사회학자는 ‘노력의 배신’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렇듯 반복되는 좌절을 겪고 있는 아이들에게 ‘돈도 실력’이라는 어이없지만 어쩌면 현실적인 말은 분노를 폭발시키기에 충분했다. ‘노력은 배신을 때리고, 돈이 실력이라니...’ 부모를 노력으로 선택할 수도 없는데 대다수 흙수저는 어쩌라는 건가?
무기력감에 빠져 있는 아이들을 어떻게 탈출 시킬 수 있을까? 일단 분노를 건강하게 표현 할 수 있을 때 긍정의 힘이 생긴다. 촛불 집회 자유발언대에서 분노를 건강하게 터트리던 청소년들을 우리는 보았다. 분노를 억누르고만 있으면 무기력이 된다.
그리곤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부모가 먼저 성공 지향적인 삶의 태도에서 탈출해야 한다. ‘무엇이 행복한 삶인가?’를 처음부터 다시 질문해야 한다. 천편일률적인 세상의 평가 잣대를 벗어던지고 자기 내면을 들여다 보는 연습을 하고 이런 성찰의 방법을 아이들에게도 가르쳐야 한다.
아이들에게 경쟁에서 이기는 법을 가르치기 보다 협동의 즐거움을 가르쳐야한다. 아이들로 하여금 ‘누군가를 위한 작은 별이 자기 안에서 돋아나는 작은 소망’을 갖게 해야 한다. 이건 촛불 혁명 보다 더 어려운 혁명 일 수 있다. 우리에겐.
이호분(소아 정신과 전문의, 연세누리 정신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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