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나 예상대로였다. 매카시즘은 ‘나쁘다더라’거나 ‘나쁘다’는 풍월 또는 선입관적 인식으로 인해 ‘사실과 다른 사실’을 조작하는 영화. 좌파이념 과잉의 영화. 표면적으로는 개인의 생각이나 신념을 국가가 간섭해서는 안 되며 표현과 창작의 자유는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같지만 실은 진보주의는 옳고 ‘파시즘과 동의어인’ 반공주의와 보수주의는 틀렸다는 소신이 흘러넘쳤다. 영화 ‘트럼보(2015)’ 얘기다.
하긴 1940~50년대 할리우드를 휩쓴 매카시즘의 ‘빨갱이 마녀사냥’에 걸려 블랙리스트에 오른 뒤 가명과 필명으로 시나리오를 썼음에도 아카데미상을 두 차례나 거머쥔 ‘천재 작가’ 돌턴 트럼보의 전기영화이니만큼 오로지 그의 시각이 주안점이 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트럼보는 누명을 쓴 마녀, 억울한 빨갱이가 아니었다.
영화에서 그는 노동자 파업을 지지하는가 하면 인간의 기본권과 소신, 대의(大義)를 강조하는 진보주의자로 그려지지만 현실의 그는 부르주아적 세속의 부(富)를 즐기는 ‘강남 좌파’였고, 인간의 기본권과는 담을 쌓은 스탈린과 김일성의 공산 전제정권을 옹호한 국제공산주의자로서 정식 공산당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의회 청문회에서 공산당에 가입한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답변을 회피한 채, 즉 진정한 자기 정체를 숨긴 채 “예, 아니오로만 답하라는 건 노예에게나 하는 주문”이라는 둥 엉뚱한 대답만 한다. 우리나라 친북 종북파들에게서 자주 보아온 ‘논점 흐리기’라는 진보 좌파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하지만 영화를 둘러싼 이념 논쟁, 역사적 사실 논쟁은 그만 두자. 내가 이 영화에서 착안한 건 과연 가장(家長)이란 무엇이고 가정, 가족의 가치와 모럴은 어떤 것이어야 하느냐다.
트럼보는 할리우드의 기피인물로 블랙리스트에 오른 후 일거리가 끊어진다. 그러나 밥벌이는 해야 했고, 그 결과 이런 저런 가명과 필명으로 대부분 허접한 시나리오를 대량으로 써서 싸구려 영화사에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원래는 고료수준이 최고인 1급 작가였으나 이젠 편당 1200달러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신세가 된 그는 밥 먹듯이 밤을 새며 집필 작업에 매달린다. 그러다보니 가정사에 소홀해진 건 당연지사. 그런데도 그 같은 집안 상태를 알만도 한 큰딸이 자신의 16세 생일을 맞아 작업 중인 아버지가 생일을 축하해주지 않는다며 불만을 터뜨린다. 그러자 트럼보는 작업 중일 때 방해했다며 화를 낸다. 이에 딸은 더욱 분노한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밤낮없이 일하는 아버지가 자신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오히려 화를 냈다고 용서할 수 없다는 것.
또 그로부터 얼마 후 트럼보가 완성된 시나리오를 영화사에 갖다주라는(자신은 얼굴을 드러낼 수 없으니까) 심부름을 자녀들에게 시키자 딸은 흑인 민권운동 데모에 참가해야 한다며, 또 아들은 데이트가 있다며 거부한다. 트럼보가 화를 내며 강제로 심부름을 시키려 하자 이번에는 아내가 나선다. 그토록 아이들에게 폭군처럼 구는 남자와는 같이 살 수 없다는 것. 이게 올바른, 정상적인 가정인가. 그러나 영화는 트럼보보다는 가족들의 처지에서 상황을 바라본다. 트럼보의 시련이 가족들의 ‘희생’을 초래했다는 식이다.
미국 영화가 늘 보여주는 이러한 이상한 가정의 모습은 ‘트럼보’에만 나타나지 않는다. 최근 이 난에서 소개한 영화 ‘굿 킬’도 마찬가지다. 무장 드론을 조종해 테러리스트들과 싸우는 임무를 수행하는 주인공 토머스 이건 소령은 비록 전장에서 멀리 떨어져 출퇴근은 할망정 대테러전쟁을 치르는 군인이다. 또한 비록 ‘적’이라고 해도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엄중한 업무를 처리한다. 그러나 그 업무가 종종 퇴근시간을 넘겨 길어지자 엄마 대신 아이들을 하교시키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아내한테 야단을 맞는다. 아내가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인 남편에게 아이들 하교를 맡긴 건 시간당 50달러짜리 피트니스 프로그램에 나가기위해서였다.
‘트럼보’나 ‘굿 킬’처럼 미국영화를 보면 이해가 안 되는 때가 많다. 많은 미국 영화들에 따르면 가장은 남편, 아버지 노릇을 하는 게 그 무슨 일보다 우선이다. 시간 외 직장 일이나 공적인 사회생활은 아예 포기해야 하고 때로는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한 일 자체도 과감하게 무시해야 한다. 그런 것들보다는 아이들 학예회나 운동시합 참관이 휠씬 더 중요하다. 어쩌다 그 중요한 일에 빠지기라도 하면 온갖 원망에 시달려야 한다.
그리고 그런 ‘특별행사’가 아니더라도 퇴근만 했다 하면 집으로 달려와 마누라 얼굴 바라보면서 비위를 맞추거나 애들과 놀아주기 등 집안일에 매달려야 한다. 그렇지 않았다간 ‘가정에 소홀했다’는 이유로 소박맞거나 이혼 당하기 일쑤다. ‘트럼보’에서는 아내가 어찌 어찌 넘어갔지만 ‘굿 킬’에서는 이건 소령이 전쟁을 수행하는, 즉 사람의 생사를 다루는 ‘업무’ 때문에 마누라와 애들에게 소홀했다는 이유로 아내에게 버림받는다. 아내가 못살겠다며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가버린 것. 도대체 가장이 가족들 먹여 살리려, 때로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업무’에 시달리다 가정이랍시고 돌아오면 따뜻하게 맞이하고 위로하고 보듬어줘야 할 가족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남편은, 아버지는 오로지 아내와 아이들 비위 맞추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헌신해야만 하는가. 이런 것이 미국의 대중문화, 특히 영화가 허구 헌 날 강조하는 ‘가정의 소중함’이요 ‘가족의 가치’인가. 물론 사회적 구성체의 기본단위인 가정의 해체가 위험수준에 도달했다는 자각에서 가정, 가족 제일주의가 지나칠 정도로 강조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무조건 처자식 위주여야 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가장은 가정의 노예가 아니다.
김상온(프리랜서 영화라이터)
GoodNews paper Ϻ(www.kmib.co.kr), , , AIн ̿
[김상온의 영화이야기] <69> 가족이란 무엇인가
Ŭ! ̳?
Ϻ IJ о
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