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으로 짐작할 수 있듯, 지난 8일 개봉한 영화 ‘슬로우 웨스트’의 배경은 서부입니다. 우주에 고독과 극기가 가득한 만큼 서부는 증오와 복수로 꽉 차 있죠. 건맨의 총구에서 발사된 총알 같이 직관적이고, 누런 흙먼지처럼 전형적인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공간입니다. 이 같은 서부 영화의 장르적 특성은 장점이 되기도 하고, 단점이 되기도 합니다. 한 세기 가까이 굳어져 온 장르를 답습하느냐, 진보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슬로우 웨스트’는 서부 영화의 요소들을 일부 그대로 가져가면서도 독특한 변주를 통해 차별화를 시도한 작품입니다. 우선 굉장히 특이한 관계가 등장합니다. 보통 서부극의 우정은 건맨들의 전유물이었는데요. 이 영화에서는 16살 짜리 소년 제이(코디 스밋 맥피 분)와 현상금 사냥꾼 사일러스(마이클 패스벤더 분) 사이에서 발생합니다. 사람의 목숨이 지폐 몇 장의 가치보다 하찮게 여겨지는 위험한 시대에 여자친구를 보겠다고 스코틀랜드에서 미국 대륙까지 건너온 순수한 청년과, 마치 짐승처럼 거친 풍채의 총잡이가 우연히 만나 여행을 시작하게 되죠. 처음에는 서로에게 거부감을 느끼고, 이용하려고도 드는 두 사람이지만 몇 번의 위기를 함께 넘긴 후 어느덧 친구가 돼 있습니다. 나이도 성격도 살아온 환경도 다른 제이와 사일러스가 의지하고 교감하는 과정에서 서부 영화의 전형성은 상당 부분 희석됐다고 볼 수 있겠네요.
또 여타 서부극과 달리 무성한 초록 사이로 흐르는 빛과 물은 이 영화의 볼거리입니다. 다채로운 경치와 풍광이 가득한 뉴질랜드에서 촬영을 했던 것이 주효했습니다. 제작자 이언 캐닝에 따르면 ‘슬로우 웨스트’를 뉴질랜드에서 촬영하게 된 이유는 길 하나만 지나면 스코틀랜드, 또 다른 길을 지나면 아일랜드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라네요. 덕분에 건조하고 살벌한 서부의 분위기 가운데서도 제이와 사일러스의 따뜻한 우정이 매우 효과적으로 표현될 수 있었습니다.
짐 자무쉬의 ‘데드맨’을 연상케 하는 신화적 연출과 코엔 형제의 ‘더 브레이브’를 떠올리게 하는 싸늘한 성장담 역시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슬로우 웨스트’가 빛나는 지점은 가장 폭력적인 시대에 꽃을 피운 순수를 보여줬다는 것이겠지요. 극 중 사일러스는 제이가 찾으려 하는 여자친구 로즈(카렌 피스토리우스 분)에게 엄청난 현상금이 걸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제이에게 받은 얼마간의 돈이나 그를 향한 연민 때문에 동행하는 것이 아니었죠. 그런 사일러스에게 제이는 “나를 도와주는 이유를 알겠다”고 말합니다. 사일러스가 놀란 표정을 짓자 제이는 묻습니다. “당신도 외로워서 도와주는 거죠?”
야만의 시대, 야만의 공간에서도 제이의 순수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유지됩니다. 그리고 그 순수는 사일러스를 감화시키죠. 아무렇지 않게 피로 흥건해진 바닥은 제이가 남긴 순백의 마음으로 뒤덮입니다. 그래서 ‘슬로우 웨스트’의 결말은 슬프고도 아름답습니다.
이 영화는 2015 선댄스 영화제에서 월드시네마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호평 받은 작품입니다. 마이클 패스벤더가 지난 2010년 직접 설립한 영화사 DMC 필름의 첫 장편 영화이며 그의 서부극 도전작이기도 하죠. DMC 제작 단편 영화 ‘피치 블랙 하이스트’를 연출한 베타밴드 출신의 존 맥클린이 메가폰을 잡았습니다. 영화 외적인 부분에서도 구미가 당기는 요소들이 많은 작품이네요.
라효진 기자 surplu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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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 웨스트’, 가장 폭력적인 시대에 꽃 핀 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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