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휴식은 없었다. 대표팀 선수들은 가혹한 살인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대표팀은 월드컵과 동아시안컵 이전에도 이미 많은 국제대회들을 소화했다. 지난 1월 중국 쉔젠 4개국 친선대회, 2~3월 키프로스컵을 치르고 숨을 돌릴 틈도 없이 3월16일 개막한 여자축구 WK리그에 돌입했다. 대표팀은 5월에 다시 소집돼 월드컵과 동아시안컵을 준비했다. 리그 일정은 월드컵과 동아시안컵 전후와 그 사이에도 있었다. 선수들에게 여름휴가는커녕 잠깐의 휴식도 허락되지 않았다. 선수들은 지칠 대로 지쳤다.
대표팀의 ‘캡틴’ 조소현(28·현대제철)을 지난 11일 서울 여의도동 국민일보 사옥의 카페에서 만났다. 대표팀 선수들의 근황을 묻고 여자축구의 미래를 논의하기 위한 인터뷰에서 조소현은 시작부터 “혹사를 당한 기분이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조소현은 대표팀을 관리하는 대한축구협회와 WK리그를 주관하는 한국여자축구연맹 사이에서 미숙하게 짜여진 일정을 놓고 강하게 불만을 토로했다.

“연맹 임직원들도 휴가는 다녀오지 않았을까요?”
조소현은 “국제대회와 WK리그 일정이 너무 빡빡했다. 혹사를 당한 기분”이라고 했다. 조소현과 대표팀 선수들은 캐나다 월드컵을 마치고 지난 6월24일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월드컵 1승부터 사상 첫 16강 진출까지 일궈낸 선수들은 잠깐의 환영을 받고 곧바로 소속팀으로 복귀했다.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휴식이 아니었다. 닷새 뒤인 6월 29일부터 다시 열린 리그 14라운드였다.
조소현은 “대표팀 관계자들은 소속팀으로 돌아가 잘하라고 했고 소속팀도 리그에서 성적을 내기 위해 (대표팀으로 차출된) 주요 선수들을 경기에 투입하길 원했다”며 “우리도 대표팀과 소속팀에서 모두 잘하고 싶지만 이런 일정이 결국 선수들에게 악재로 작용했다”고 주장했다.
지금도 휴식 없이 진행 중인 살인일정은 협회와 연맹의 미숙한 행정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일정을 조율하기는커녕 선수들의 체력조차 고려하지 못한 셈이다.
프로축구 K리그나 프로야구 KBO리그는 올림픽, 월드컵, 아시안게임 등 국제대회가 있을 때마다 개막일이나 포스트시즌 토너먼트 일정을 조율한다. 선수들의 체력 안배는 물론 팬들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여자축구의 상황은 달랐다. 인기종목보다 상대적으로 관심이 부족한 여자축구의 그늘은 일정표에까지 마수를 뻗히고 있었다.
조소현은 “리그 일정을 월드컵에 맞게 조율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연맹이 선수들에게 베풀 수 있는 배려의 문제다. 연맹 임직원들도 여름휴가는 다녀오지 않았겠는가. 우리는 쉬지 못했다”고 했다. 그나마 대표팀 주장이어서 용기 있게 할 수 있는 발언이었다.

심서연도 쓰러뜨린 부상… “이러니 다칠 수밖에”
WK리그는 지난 5월18일 13라운드를 마지막으로 일시 중단됐다. 불과 20여일 뒤인 6월6일 개막하는 월드컵을 위해서였다. 선수들은 6월10일 브라질(0대 2 패), 14일 코스타리카(2대 2 무), 18일 스페인(2대 1 승)과 차례로 싸웠다. 같은 달 22일 프랑스와 16강전(0대 3 패)을 벌이고 이틀 만에 한국 땅을 밟았다.
리그는 귀국 닷새 뒤인 29일 14라운드부터 재개됐다. 대표팀 선수들은 7월20일 18라운드까지 한 달 동안 리그 일정을 소화했다. 그리고 나흘 만인 같은 달 24일 다시 대표팀으로 합류해 중국 우한으로 이동했고 8월1일 개최국 중국과 동아시안컵 개막전(1대 0 승)을 벌였다. 3~4일 간격으로 경기가 있는 살인일정은 동아시안컵에서도 이어졌다. 4일 일본(2대 1 승), 8일 북한(0대 2 패)과 대결하고 귀국해 다시 리그 일정으로 돌입했다.
심서연(26·이천대교)은 이 과정에서 쓰러졌다. 심서연은 중국과의 개막전에서 조소현의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를 대신했다. 심서연은 풀백이지만 조소현, 전가을(27·현대제철), 권하늘(27·부산 상무) 등 주전 선수들이 컨디션 난조로 대거 빠지면서 위치를 이동했다.
수비형 미드필더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심서연이지만 그동안 호흡을 맞춘 동료들의 빈 자리를 혼자 감당하기란 쉽지 않았다. 중국 선수와의 충돌에서 십자인대가 파열돼 들것에 실려 나갔고 그대로 귀국했다. 빼곡한 일정이 선수들의 체력 저하로 인한 결장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한 선수의 심각한 부상까지 초래한 셈이다.
조소현은 “누구든 부상을 당할 수 있다. 하지만 혹독한 일정 탓에 정상 컨디션이 아니었다. 심서연도 그랬다”고 말했다.
선수들은 심서연을 위해 이를 악물고 뛰었다. 조소현의 활약이 빛났다. 조소현은 일본에 0대 1로 뒤진 후반 9분 수비수를 앞에 두고 골문 구석을 가른 통쾌한 오른발 슛으로 동점골을 넣었다. 곧바로 벤치로 달려가 심서연의 유니폼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러나 동점골을 넣은 조소현의 얼굴에서 웃음기는 찾을 수 없었다. 골을 넣은 기쁨보다 심서연을 걱정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조소현은 “세리머니가 화제가 될 줄은 몰랐다. 당시 동료들이 심서연의 부상을 보면서 마음을 더 단단히 먹었다. 우리가 무언가를 해줘야 한다고 이야기를 나눴다. 중요한 시점에 골을 넣고 준비한 골 세리머니도 할 수 있어서 기뻤지만 심서연과 동료들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고 말했다.

프리미어리그는 2달 휴식… 선수가 우선인 유럽
지소연(24·첼시)이 활약하고 있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경우 5월 10일부터 7월 12일까지 두 달간 휴식했다. 7월 5일 열린 월드컵 결승전 일정을 감안해 일주일 정도의 여유를 두고 리그를 재개했다. 월드컵 기간 중 리그가 열린 WK리그와 비교되는 부분이다. 지소연은 월드컵을 마치고 우리나라에서 충분한 휴식한 뒤 7월 3일 여유 있게 출국했다. 지소연은 “휴가도 없이 소속팀으로 복귀한 대표팀 동료들에게 미안하다”며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심서연은 수술을 위해 지난 13일 독일 쾰른으로 출국했다. 수술 이후 재활까지 약 두 달간 독일에서 보낼 것으로 보인다. 심서연의 부상은 대표팀과 소속팀에 모두 큰 손실이다. 대표팀은 내년 2월로 예정된 2016 리우올림픽 최종예선을 준비한다. 심서연이 얼마나 빠르게 회복할지는 대표팀에도 초미의 관심사다.
조소현은 “올림픽 본선 진출권을 따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표팀이나 소속팀에서 선수들이 좋은 컨디션으로 활약해야 축구팬들도 여자축구에 관심을 갖고 경기장을 찾게 될 것”이라고 했다. 조소현은 “선수들이 있어야 연맹도 존재한다. 선수들이 좋은 모습을 계속 보일 수 있어야 여자축구가 더 발전 할 수 있다. 운영체제의 개선이 이뤄지길 기대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협회는 지난달 7일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우리나라 여자축구의 저변 확대를 위한 테스크포스(TF)를 가동했다. TF팀은 오는 12월까지 매주 화요일 오후 7시에 정기 회의를 갖고 여자축구 발전을 논의할 계획이다.
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
사진=대한축구협회, 한국여자축구연맹, 지소연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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