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온의 영화이야기] 35. 007의 유일한 라이벌 마이클 케인

Է:2015-08-31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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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온의 영화이야기] 35. 007의 유일한 라이벌 마이클 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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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온의 영화이야기] 35. 007의 유일한 라이벌 마이클 케인
[김상온의 영화이야기] 35. 007의 유일한 라이벌 마이클 케인
[김상온의 영화이야기] 35. 007의 유일한 라이벌 마이클 케인
마크 월버그가 주연한 도둑질 영화 ‘이탈리안 잡(2003)’, 실베스터 스탤론이 주연한 액션물 ‘겟 카터(2000)’, 주드 로가 주연한 로맨틱 코미디 ‘알피(2004)’. 이 세 영화의 공통점은? 셋 다 리메이크작이라는 것이고, 오리지널의 주연이 모두 마이클 케인이었다는 사실. 마이클 케인은 요즘 젊은 관객들에게는 ‘배트맨의 집사’ 정도로나 알려져 있지만 한창때는 이처럼 각각 머리 좋은 도둑놈 두목(1969), 런던의 갱(1971), 그리고 바람둥이 운전기사(1966)같은 다양한 캐릭터를 모두 연기한 만능 배우였다.

그런 케인이 느닷없이 떠오른 것은 만화 같은, 실제로 만화가 원작인 스파이영화 ‘킹스맨’에서 그가 스파이조직의 수장으로 출연한 것을 보고서였다. 지금으로부터 딱 50년 전인 1965년 마이클 케인은 역시 스파이로 영화에 출연해 오늘날 출세의 길을 열었다. 물론 그때는 스파이 조직의 장(長)이 아니라 바닥에서 박박 기는 말단 역할이었다. ‘국제첩보국(Ipcress File)'의 해리 파머. 숀 코너리가 맡은 007 제임스 본드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당시 본드에 필적한 유일한 본드의 라이벌이었다.



1960년대 본드 영화가 세계를 휩쓸자 아류 스파이영화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영국의 007에 대응해 프랑스에서 ‘OSS 117’이 나왔고, 독일(서독)에서는 ‘앗파7’을 내놓았지만 대체로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미국에서 본드의 대항마로 내놓은 스파이물 한두 개는 그나마 나름대로 인기를 끌었다. 주연을 맡은 제임스 코번을 완전히 스타 자리에 올려놓은, 전천후 슈퍼맨 스파이 데레크 플린트 시리즈와 가수 겸 배우 딘 마틴을 능글대는 플레이보이 스파이로 만든 매트 헬름 시리즈. 그러나 이것들도 플린트는 두 개(‘Our Man Flint' ’In Like Flint'), 헬름은 네 개(‘The Silencers' ’Murderers Row' ‘The Wrecking Crew’ ‘The Ambushers')밖에 영화가 만들어지지 못했다.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본드영화에 비하면 단명이라기보다 요절한 셈. 어쨌거나 본드의 유일한 라이벌이 같은 나라인 영국, 그것도 본드영화의 제작자인 해리 살츠먼에 의해 탄생된 해리 파머였다는 게 기이할 따름이다. 다만 파머 영화도 60년대에 2편(‘Funeral in Berlin’ ‘Billion Dollar Brain'), 그리고 나중에 90년대 들어 2편(‘Bullet in Beijing' ‘Midnight in St.Petersburg')이 더 만들어지는 것으로 끝났다.



살츠먼은 공동제작자 앨버트 브로콜리와 함께 특급 호텔만 이용하면서 고급 자동차와 도박을 즐기는 호화로운 스파이 제임스 본드를 창조해놓고 선풍적인 인기와는 별도로 일각에서 너무 비현실적이라는 비난이 일자 대단히 현실적인, 박봉에 시달리는 전형적인 공무원 스파이 해리 파머를 따로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역할로 당시 ‘줄루(Zulu 1964)'로 겨우 얼굴을 알린 신인 마이클 케인을 발탁했다. 그것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케인은 전형적인 런던 하층민 출신으로 데이비드 니븐이나 로렌스 올리비에처럼 영국 하면 생각나는 ‘귀족’형 배우들과는 동떨어진, ‘서민’ 냄새를 물씬 풍기는 이른바 ‘코크니’ 배우였다. 실제로 그는 셰익스피어극 등 고전 연극을 통해 잔뼈가 굵은 대다수 유명 영국 배우들과는 달리 제대로 연기를 배운 적도, 고전 연극에 출연한 적도 거의 없었다. 1964년에 BBC가 제작한 크리스토퍼 플러머 주연의 ‘햄릿’에서 햄릿의 친구 호레이쇼역을 맡은 게 고전극에 출연한 거의 전부였다. 바로 그런 그의 비귀족적, 서민적 이미지와 비좁은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현실적인 스파이 해리 파머가 잘 어울렸던 것.

그렇다고 렌 데이턴의 소설이 원작인 해리 파머가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나 ‘팅커 테일러 솔저 앤드 스파이’같은 걸작을 쓴 스파이소설의 거장 존 르 카레의 작품에 나오는 것 같은 ‘진짜 스파이’형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본드 영화의 대표적인 악역 블로펠드와는 약간 다르지만 그래도 역시 황당한 악당을 상대하는 본드식 첩보원이다. 다만 그의 환경이라든지 캐릭터가 본드와 달리 대단히 현실적이라는 게 차이점이었을 뿐. 어쨌든 그 역할을 훌륭히 해낸 게 마이클 케인이었다. 그렇다면 본드와 파머가 같이 영화에 나온다면 어땠을까? 실제로 숀 코너리와 마이클 케인이 공연한 영화가 한편 있다. ‘왕이 될 뻔한 사나이(The Man Who Would Be King, 1975). 존 휴스턴이 감독한 19세기 배경의 모험 액션영화다. 흥행과 비평 모두 성공했다.



본명이 ‘모리스 조지프 미클화이트’인 케인은 배우로 입문했을 때 ‘마이클 스코트’란 예명을 썼다. 그러다 다시 이름을 바꿨는데 그 사연이 재미있다. 1954년의 어느 날 런던의 오데온 극장에 갔는데 마침 극장에 붙은 프로가 험프리 보가트가 주연한 ‘케인호의 반란(Caine Mutiny)'이었다. 보가트는 당시 케인의 우상이었다. 그의 머리 속에 영감이 번득였다. ‘그래, 케인으로 이름을 바꾸자’. 나중에 그는 이렇게 농담을 했다. “하마터면 내 이름이 마이클 반란(Mutiny)이 될 뻔 했죠.”

그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다. 52년 보병으로 입대한 그는 한국에 파병됐다. 출신이 프롤레타리아였던 만큼 한국에 갈 때는 공산주의에 호의적이었지만 귀국할 때는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전장에서 죽을 뻔한 고비를 겪었고 이후 그 경험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아울러 그는 청소년 일탈과 관련해 그것을 막으려면 청소년들을 군대에 보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 군대에 들어가 나라에 소속감을 느끼고 어떻게 나라를 지켜야 하는지 배우다 보면 청소년 폭력 같은 문제는 자연히 해결된다는 것이었다.



전형적인 서민 마이클 케인은 그러나 2000년에 귀족이 됐다. 영화계에 공헌한 공로를 인정받아 기사 작위를 받은 것. 그럴 만도 한 게 그는 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각 10년대에 빠지지 않고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두 명의 배우 중 한사람(나머지 하나는 잭 니콜슨이다)이었고, 실제로 1986년과 1999년에 두 차례나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을 정도로 인정받았다. 그는 앞으로도 로렌스 올리비에, 알렉 기네스, 데이비드 니븐, 피터 오툴, 앤소니 홉킨스 등과 함께 영국을 대표하는 배우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김상온(프리랜서·영화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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