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통일을 위한 눈물기도

Է:2015-08-16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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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홍 목사(우이 감리교회)


올해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0년이고, 분단된 지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리는 일제 치하에서 갖은 고난과 고초를 겪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마침내 광복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차이로 남과 북이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함께 독립운동을 하고 해방의 감격을 누렸던 한 민족이 지금은 서로를 향하여 총부리를 겨누고 있습니다. 비무장지대에서 발생한 ‘목함지뢰’ 폭발사고는 광복 70년이 곧 분단 70년임을 우리에게 뼈아프게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해방된 지 70년, 분단된 지 70년. 이제는 화해의 소식이 들릴 만한데 여전히 남북 간에는 서로를 못 잡아먹어 으르렁거리고 있습니다. 통일의 소식이 동해를 지나 서해에 파도처럼 넘실거리고, 통일의 소식이 백두산을 넘어 유라시아에 이르고, 통일의 소식이 한라산을 넘어 태평양까지 퍼져나가는 그 날이 오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통일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한민국의 통일은 외교력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군사력으로도 이룰 수 없습니다. 경제력으로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통일 방법이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마음을 성경 ‘느헤미야’를 묵상하면서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눈물의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우리 안에 하늘의 생수가 있느냐 없느냐를 가늠하는 것 중의 하나가 눈물입니다. 눈물은 그것을 흘리는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합니다. 눈물은 그것이 흘러가는 사람의 아픔과 갈등과 분노를 쓸어냅니다. 눈물은 사랑의 묘약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은 말랐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눈물을 잃어버렸습니다. 죄를 범하고 흘리는 통회자복의 눈물이 없습니다. 불쌍한 이웃을 보고 흘리는 동정의 눈물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흘리는 감격의 눈물도 없습니다. 나라가 분단되어 찢어졌어도 아픔의 눈물이 없습니다.

눈물을 회복합시다. 언제 눈물이라는 것을 흘려본 기억이 있습니까? 성령 충만한 사람은 ‘예수님’ 얘기만 해도 눈이 시뻘겋게 충혈됩니다. 은혜 충만한 사람은 눈물이 마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에 눈물이 말랐다는 것은 우리 심령에 하나님의 은혜가 말랐다는 사실에 다름이 아닙니다. 방황하는 자녀를 책망하기보다는 먼저 자녀를 위한 눈물을 회복합시다. 흔들리는 남편을 비난하기보다는 먼저 남편을 위한 눈물을 회복합시다.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에 대하여 비판하기보다는 먼저 그들을 위한 눈물을 회복합시다.

이스라엘의 변화의 시대에 눈물로 세상을 바꾼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느헤미야입니다. 변화의 능력은 언제나 눈물에서 옵니다. 제도가 세상을 바꾸고, 법이 세상을 바꾸고, 때론 힘이 세상을 바꾸는 듯해도 언제나 변화의 원천은 눈물입니다. 세상은 결국 눈물을 흘리는 자에 의해 변화됩니다. 느헤미야는 주전 587년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짓밟혔을 때 포로로 끌려갔던 유대인 후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가, 그의 아버지가 낯선 땅인 바벨론에 끌려와 말할 수 없는 비참한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바벨론마저 페르시아에게 망해버렸습니다. 이 역사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태어난 사람이 느헤미야였습니다.

느헤미야가 눈물을 흘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그의 친척 동생 중 하나인 하나니가 왕궁으로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예루살렘을 다녀왔다면서 울기부터 하는 것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깜짝 놀라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더니 하나니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느 1:3절). 조국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지고, 성문들은 모두 불타 없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남아 있는 백성들마저 환난과 능욕을 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말을 듣고 울었다고 했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느 1:4)

유대인들은 얼마나 애국심이 강한 민족입니까? 지난 2000년 동안 나라를 잃고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동족들끼리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이런 인사를 했습니다. “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바샤나 하바아 베 예루샬라임-Next year in Jerusalem) 그렇게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을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우리의 애국가에 해당하는 ‘하티크바’(희망)라는 이스라엘 국가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유대인 마음속에 간직한 깊은 열망이 있었네/ 그것은 언젠가 동쪽으로 나아가는 것일세/ 내 눈이 바라보는 시온, 우리의 희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네/ 2000년 동안 가졌던 그 희망, 우리 땅에서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그 희망, 시온과 예루살렘 그 땅에서.”

유대인에게 예루살렘은 단순한 수도가 아닙니다. 정신적 지주요, 영적 고향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불탔다는 것은 자신들의 뿌리와 근거가 없어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느헤미야가 어찌 슬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느헤미야가 눈물을 흘린 더 중요한 이유는 백성들의 마음에 있는 믿음의 성벽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가 울었던 것은 예루살렘성이 무너지고, 백성들이 시련을 당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깨달은 것입니다.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느 1:6~7절). 느헤미야가 가슴 아파하고 통곡한 것은 백성들의 마음속에 있었던 신앙의 성벽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내면의 성벽, 그 성벽이 무너져 있었습니다. 그 마음의 성벽, 그것이 무너져 외부의 성벽이 무너진 것입니다. 문제는 언제나 내면의 성벽입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사방 약 4㎞이며, 성의 높이는 평균 17m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성벽이 아닙니다. 성벽이 무너지면 다시 세우면 됩니다. 현재 있는 예루살렘 성벽도 16세기인 1530년경에 아랍왕조에 의해 세워진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비잔틴 시대 기독교인이 성벽을 세웠고, 그 이전에는 로마가, 그 이전에는 헤롯이, 그 이전에는 오늘의 주인공 느헤미야가, 그 이전에는 히스기야, 그리고 솔로몬이 세운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벽이 무너지면 다시 세우면 됩니다. 문제는 마음의 성벽입니다. 마음의 성벽이 무너지면 눈에 보이는 나라의 성벽도 무너집니다. 믿음이 무너지면 가정이 무너지고, 예배가 무너지면 교회가 무너지고, 기도가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집니다.

우리 자신들을 되돌아봅시다. 우리가 가난했을 때에는 가난했을 망정 믿음의 성벽만큼은 굳건히 세웠습니다. 그런데 국민소득이 2만 달러 이상이 된다는 소리가 나오고부터 믿음의 성벽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한국 대학생들의 기독교인 비율이 5%에서 3.5%로 줄어들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대학생 100명 중 3.5명만 기독교인이라는 거지요. 5%라고 해도 말이 안 되고, 한숨이 나오는데 3.5%라니. 대학생은 우리 다음세대의 리더들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의 다음세대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믿음의 성벽이 무너졌습니다. 기도의 제단이 허물어졌습니다. 자신의 심령을 살펴보세요. 그래서 느헤미야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고 성문이 훼파된 것은 내 백성의 마음의 성소가 훼파되고 하나님을 섬기던 마음의 성벽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주님, 눈에 보이는 성벽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한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조상이, 우리가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습니다. 이제 자복하고 회개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것이 느헤미야가 눈물을 흘린 근본적인 이유였습니다.

모든 것이 마음의 성벽에서 시작됩니다. 기독교 2000년 동안 일어난 모든 부흥이 회개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입니다. 1907년 한국교회의 대부흥운동도 그러했습니다. 1907년 1월 13~14일 평양 장대현교회에 입추의 여지가 없이 성도가 모였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많이 모였다고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첫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둘째 날 설교 후 기도하는 시간에 장로 길선주가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1년 전 세상을 떠난 자신의 사랑하는 친구가 죽기 전 아내 대신 재산을 정리하여 달라는 부탁을 받고 일을 처리하다 상당한 돈을 사취했다고 그는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고백하라고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가 입을 다물고 있었다면 아무도 몰랐을 일을 그는 스스로 나가서 고백하고 만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아간과 같은 자입니다. 저 때문에 하나님께서 교회에 축복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 약 1년 전에 제 친구 중 한 사람이 임종시에 저를 그의 집으로 불러서 말하기를 ‘길 장로, 나는 이제 세상을 떠날 것 같으니 내 재산을 잘 정리해 주시오. 내 아내는 셈이 약하기 때문이오’라고 부탁했습니다. 저는 내가 잘 돌보아 드릴 테니 염려하지 말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미망인의 재산을 관리하다 미화 100달러 상당의 금액을 사취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해온 것입니다. 내일 아침에 그 돈 전액을 미망인에게 돌려드리겠습니다.” 100달러라고 해야 겨우 10만원입니다. 큰돈도 아닙니다. 그것을 길선주는 자신이 아간이라고 하면서 공개적으로 회개한 것입니다.

남이 가로막고 있어 교회가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문제의 근본은 언제나 나에게 있습니다. 내가 아간이요, 나 때문에 우리에게 축복이 없고, 나 때문에 우리 중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너 때문이야’ 하고, 다른 사람을 울리는 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나 때문입니다’ 하고 내가 우는 것이 은혜입니다. 눈을 부릅뜨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절대 눈을 부릅뜨지 마십시오. 대신 눈물을 흘리십시오. 눈물만이 나를 부드럽게 하고 다른 사람을 치유합니다.

느헤미야의 울음은 공동체의 울음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느 8:8~9절) 백성들이 울었습니다. 세상에는 울 일이 많습니다. 세상에서 울면 슬프고 외롭습니다. 자기 연민에 빠집니다. 세상에 나같이 불쌍하고, 불행한 사람이 없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울면 위로와 평안이 있습니다. 치유가 있습니다. 회복이 있습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울었다는 것은 마음이 깨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성도는 깨어진 성도입니다. 학식이 많은데 깨어지지 않았으면 그 학식은 사람을 살리지 못합니다. 열심은 있고 자기 주관은 있는데 깨어지지 않았다면 그 열심은 자기 의를 이루는 열심이 되고, 그 주관은 자기 고집을 이루는 고집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쓰임 받으려면 깨어져야합니다. 시편 51편 17절에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한반도의 통일도 이렇게 온다는 것을 확신합시다. 우리의 통일은 외교력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군사력으로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의 통일은 눈물의 기도만이 이룰 수 있습니다. 이 눈물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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