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위에서부터 순서대로)
- 소쇄원 광풍각 앞에 조성된 사각 연못 / 물길을 그대로 살린 소쇄원 오곡문과 흙돌담 / 소쇄원 제월당과 현판 / 소쇄원 대나무 숲 / 제월당 앞 정원의 이별란 / 광풍각 / 조선 중기 문신 김인후가 소쇄원 48영 연작시를 흙돌담에 써 붙였던 흔적 / 광풍각 옆 배롱나무 고목 가지에서 자라는 벚나무 기생수 / 식영정 / 식영정 마루에서 바라본 주변 풍경 / 식영정 창밖으로 펼쳐진 소나무 군락 / 환벽당 앞 연꽃 연못 / 환벽당 / 명옥헌 / 명옥헌 연못에 떨어진 배롱나무 꽃잎 / 담양=구성찬 기자
담양(潭陽)은 예로부터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고, 아무리 큰물이 들어도 물난리를 겪지 않는 땅이라고 했다. 추월산, 병풍산, 삼인산 등 해발 700m 안팎의 수려한 산들과 물이 풍부한 덕분이다. 조선시대에 관직에서 멀어졌던 죽림처사들이 소쇄원, 식영정, 면앙정, 송강정, 명옥헌 등 숱한 정자와 원림을 만들어 유유자적하며 누정시단(樓亭詩壇)을 형성한 것도 그런 풍요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 소쇄원, 닫힌 듯 열려 있는 소통의 공간
지난달 23일 담양군 고서면 가사문학의 요람을 따라 걸었다. 소쇄원 입구의 대나무 숲은 4계절 언제고 좋지만, 여름에는 천연에어컨처럼 시원한 바람을 일으킨다. 탱자나무 울타리를 지나 대봉대(待鳳臺·옛 이름 소쇄정) 앞에 이르니 밑의 네모 난 작은 연못과 원추리꽃에 눈길이 간다. 동행한 전라남도 문화관광해설사 조정숙씨는 “연못은 풍류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화재시 방화수로 쓸 용도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씨는 김인후(金麟厚)의 소쇄원 48영 중 제6영 ‘소당어영(小塘魚泳)’을 소개했다. ‘네모진 연못 한 이랑도 못되나,/ 맑은 물받이 하기엔 넉넉하구나./ 주인의 그림자에 고기떼 헤엄쳐 노니,/ 낚싯줄 내던질 마음 전혀 없어라.’ 물고기들이 주인을 반기니 어떻게 잡을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조선 선비 양산보(梁山甫·1503~1557)는 스승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유배당한 후 사약을 받고 세상을 뜨자 그 충격으로 고향에 은둔하면서 창암촌 계곡에 소쇄원(瀟灑園)이라는 원림을 꾸민다. 맑을 소(瀟), 깨끗할 쇄(灑)다. 그는 한평생 소쇄원을 가꾸며 당대 최고의 지식인 및 문인들과 교류를 즐겼는데 김인후, 송순, 정철, 송시열, 기대승, 임제 등이 이곳을 드나들었다.
소쇄원의 건축학적 하이라이트는 계곡의 물길을 그대로 두기 위해 구멍을 내고 쌓은 돌담인 오곡문(五曲門)과 길이 50m에 이르는 흙돌담이다. 약 500년 전 소쇄원 건축을 기획한 양산보는 돌담집으로 유명한 제주도에서 뛰어난 석공들을 데려다 석축과 담을 쌓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흙돌담은 소쇄원을 외부와 갈라놓는 경계 구실을 하지만, 대문 없이 ㄱ 자 모양으로 돼 있어 닫힌 듯 하면서도 열려 있는 모양새다. 아늑한 폐쇄성과 시원스러운 개방성이 조화를 이뤘다. 게다가 관광객들은 그냥 지나치기 일쑤지만, 흙돌담에는 김인후가 소쇄원 48영 연작시를 써 붙여 놓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가운데 마지막 48영에서는 “긴 담이 옆으로 백 자나 되어 새로 지은 시 한 수 한 수를 써 붙여 놓았다”고 했던 것이다.
◇ 풍류의 풍경, 풍경의 풍류
제월당(霽月堂)에서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앉으니 시원한 바람과 장쾌한 풍광에 일어서기가 싫어진다. 광풍각(光風閣) 쪽으로 내려오는 길목에 500년 이상씩 묵은 것으로 보이는 산수유와 배롱나무 고목이 있다. 특히 배롱나무 고목의 한 가지 위에는 새가 똥을 누고 간 결과인지 작은 벚나무가 기생하고 있다. 해설사 조씨는 “봄에 기생수에 꽃이 피면 영락없이 어사화의 모습”이라고 말했다. 이렇듯 소쇄원에는 사계절 돌아가면서 꽃을 피우는 복사나무와 배나무(봄), 연꽃과 벽오동, 그리고 배롱나무(여름), 국화(가을), 매화와 동백(겨울)이 고루 배치돼 있다. 이를 사계화(四季花), 또는 일년경(一年景)이라고 한다.
오곡문에서 제월당으로 가는 길은 외나무다리를 건너는데 다리 아래의 돌 위에는 저절로 웅덩이가 이뤄져 있다. 이를 조담(槽潭)이라고 부른다. 이 물이 쏟아져 작은 폭포가 된다. 조담의 다른 물줄기는 운치 있는 나무홈통을 타고 흐른다. 이 나무홈통은 원래 대나무를 반으로 쪼갠 것으로 매우 길었다고 하는데 소쇄원도에 따르면 이 홈통은 비스듬하게 서 있는 와송(臥松)과 대나무의 무더기를 이룬 총균(叢筠), 그리고 소정(小亭)이 서 있는 대봉대 아래를 굽이쳐 지나서 소정 곁에 있는 소당(小塘)에 이르게 돼 있다. 광풍각 옆과 뒤로는 건너편 대봉대쪽 못으로 간다. 그러나 복원된 나무홈통은 짧고 초라하다. 또한 와송은 수간영양주사 등 온갖 응급처지에도 불구하고 몇 년 전 고사목이 되고 말았다.
외나무다리 밑의 돌 웅덩이에 담기는 물은 빙빙 돌며 넘쳐흐른다. 이 휘어 도는 물 위에 술잔을 띄우면 그 잔은 한 바퀴 빙빙 돌아서 다시 자기 앞에 온다. 술잔이 다시 올 때까지 시를 지어 읊었다. ‘물살 치는 돌 웅덩이에 둘러앉으면,/ 소반의 술안주 뜻한 대로 넉넉해./ 빙빙 도는 물결에 절로 오고가니,/ 띄우는 술잔 한가로이 서로 권하네.’ (복류전배, 복<삼수변水+復>流傳盃) 그래서 소쇄원 계곡은 ‘자연의 포석정’이었다는 말이 설득력을 지닌다.
외나무다리를 건너 제월당으로 향하는 계단식 정원에는 제법 고목이 된 왜철쭉, 그리고 상사화처럼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하는 이별란이 심겨져 있다. 광풍각의 옆과 뒤로도 파초, 치자, 석류나무, 자목련 등이 보인다. 모두 조선시대 선비들이 좋아했던 꽃이나 꽃나무들이다. 6~7월에 황백색 여섯 꽃잎의 꽃이 피는 치자나무는 노란색 염료의 원료가 됐다. 송나라 시인 소동파는 꽃이 예쁘고, 향기가 뛰어난 치자를 ‘숲 속의 부처’라고 읊었다. 김인후의 소쇄원 48영 중 제46영 ‘눈에 덮인 붉은 치자’는 그 특징을 잘 드러내 준다. ‘전에 꽃잎이 여섯이라 들었더니/ 사람들은 숲 가득 향긋하다 하네./ 붉은 열매 푸른 잎에 어우러져/ 맑고 고운 모습 눈서리 속에 있다네.’
◇ 식영정,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
소쇄원을 나와 서쪽으로 1㎞ 쯤 가다 보면 도로변의 광주호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식영정(息影亭)이 나타난다.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의 이 정자는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이 그의 장인인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을 위해 지은 것이다. 도로변 증암천 너머 언덕에는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젊은 시절 머물렀던 환벽당(環碧堂)이, 환벽당의 남동쪽에는 정철의 제자 권필이 이름을 지었다는 취가정(醉歌亭)이 자리 잡고 있다. 송강은 먼 친척인 김성원에게 글을 배웠다.
식영정은 일대에서 가장 좋은 전망을 자랑한다. 증암천의 옛 이름 자미탄(紫薇灘)의 ‘자미’란 배롱나무를 말하므로 옛날 천변에는 여름 한 철 배롱나무 꽃이 만발했을 것이다. 임억령은 ‘식영정 20영’ 가운데 하나로 ‘자미탄’을 지었다. ‘누군가 귀한 곳에나 있을 물건을/ 이곳 산 아래 물가에 심었나 보다./ 선녀 같은 모습이 물 아래 비치니/ 고기와 새들이 놀라며 시샘을 하네.’ 지금은 광주댐을 조성하고 도로를 내면서 자취가 사라지고 말았다. 정자 주위에는 아름드리 노송이 버티고 있고, 뒤뜰에는 배롱나무 노목들이 심겨져 있다.
◇ 환벽당, 곡선과 직선 사이에 놓인 푸르름
‘푸르름을 사방에 두르고 있다’는 뜻의 환벽당은 소나무와 대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는데 최근 간벌을 하면서 소나무동산 안의 이대는 모두 제거됐다. 정철과 나주목사 김윤제가 만나던 곳인 조대(釣臺) 주변 풍광도 최근 많이 변했다. 강 둔덕에 있던 왕버들과 느티나무 숲, 매운탕집 등이 모두 사라지고, 시멘트 담이 어김없이 들어섰다. 담양군 고서면과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을 잇는 새 다리 충효교가 건설됐다. 옛 풍광 특유의 자연스러운 곡선을 현대문명의 직선이 대체해 가고 있는 모습은 좀 곤혹스럽다.
면앙정 송순(宋純)은 소쇄원, 식영정, 환벽당을 가리켜 ‘한 동네 안의 세 명승’이라고 칭송했다. 식영정, 소쇄원은 물론이고, 환벽당도 정자와 그 주변의 모과 벽오동 매화 산수유나무 등이 옛날 모습이 그대로 재현돼 있다. 남겨진 시와 그림, 기타 기록들을 바탕으로 당시의 정자와 나무들을 복원했기 때문이다. 조정숙 해설사는 “어쨌든 500년 가까이 원형이 그대로 보전돼 있다는 게 놀랍다”면서 “이는 우리나라에서는 희귀한 일”이라고 말했다.
◇ 명옥헌, 자연을 병풍 삼아 자미화를 벗 삼아
마지막 행선지는 명옥헌(鳴玉軒)이다. 명옥헌은 조선 중기 오희도(1583~1623)가 자연을 벗 삼아 살던 곳으로 그의 넷째 아들 오이정(1619~1655)이 아버지를 기리며 지은 정자이다. 요즈음 명옥헌 원림의 주인은 단연 배롱나무다. 7월 하순이라 고목으로 자란 40여 그루 배롱나무들에 꽃이 아직 만개하진 않았지만 화사함을 느끼기에 부족하지 않다. 가운데에 섬이 있는 네모난 연못과 계곡물이 잠시 고여 있는 못에 동백처럼 꽃송이 채 뚝뚝 떨어진 붉은 꽃잎들이 처연하다. 꽃이 연못 위쪽에 있는 정자 오른쪽에는 벽오동, 주변에는 수 십 그루의 배롱나무와 소나무가 배치돼 있다. 담장 하나 두르지 않은 대신 주변의 자연을 병풍으로 삼은 소박함이 돋보인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전 문화재청장)는 “명옥헌의 배롱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할 만한 장관”이라고 20년 전 썼지만, 문화재청은 3년 전에서야 명옥헌 원림을 명승(58호)으로 지정했다.
배롱나무꽃은 자잘한 꽃들이 모여 포도송이가 거꾸로 선 모양으로 주먹만 한 꽃송이를 이룬다. 한자로 자미화(紫薇花)라 하고, 만당홍(滿堂紅), 후정화(後庭花)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7월부터 9월까지 꽃을 피우지만, 열흘 붉은 꽃 없다고 했듯이 한 꽃이 백일을 아름답게 피어 있는 게 아니다. 수없는 꽃이 한 열흘씩 피었다가 떨어지면 다른 꽃이 피는 릴레이 개화를 펼치는 것이다. 조선후기 꽃에 관한 수필을 많이 남긴 신경준(申景濬·1712~1781)은 ‘순원화훼잡설’에서 자미화를 절도 있는 꽃으로 예찬했다. “오직 자미화는 … 꽃잎이 생기는 것이 매우 많고 꽃이 필 때에도 힘을 쓰는 것을 똑같게 한 적이 없는 것이다. 오늘 하나의 꽃이 피고 내일 하나의 꽃이 피며, 먼저 핀 꽃이 지려 할 때 그 뒤의 꽃이 이어서 피어난다. 많고 많은 꽃잎을 가지고 하루하루의 공을 나누었으니 어찌 쉽게 다함이 있겠는가? 아마 절도의 의미를 터득함이 있는 듯하다.”
◇ 꽃나무에 투영된 엇갈린 시선
경상북도에서는 배롱나무 꽃을 예쁘게 보아 도화(道花)로 지정했지만, 제주도에서는 수피가 뼈만 남아 앙상한 듯하고 붉은 꽃이 마치 피 같다고 해서 불길한 나무라며 심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매끈하고 굴곡 진 줄기에서 여인의 몸매가 연상된다거나 꽃이 너무 붉어 선비의 집 안에 심지 않았다는 얘기가 전해오는 반면 청렴과 무욕을 상징해 법당 앞에 많이 심었다. 같은 나무라도 보는 시각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
담양의 원림들이 어느 계절 가장 좋으냐고 물으면 좀 곤란해지지만, 나는 늦가을의 단풍이 가장 좋았다. 특히 소쇄원 광풍각 근처의 애기단풍과 식영정 마당 전체를 노랗게 뒤덮는 은행잎 카펫을 잊을 수 없다. 7월말에는 큰 비 내린 뒤 2~3일 지나서 흙탕물이 가셨을 때 소쇄원계곡이 좋다고 한다. 약 500년 전 계곡물이 늘 풍부했을 때가 재현된다고 보면 될 것이다. 8월초와 8월말에는? 80~150년 된 배롱나무 고목의 붉은 꽃들이 불붙는 장관을 이루는 명옥헌 원림으로 갈 일이다.
송순의 분재기(分財記)에 따르면 담양의 죽림처사들이 얼마나 부자였는지를 알 수 있다고 유홍준 교수는 지적한다. 그들 중 일부는 관직을 자의 반, 타의 반 떠나 있으면서 짐짓 은둔을 과시하면서도 조정에 귀를 기울이고, 권토중래를 꿈꿨다. 아마 정철이 그런 인물의 대표 격일 것이다. 원림과 정자 문화에서도 중국대륙으로부터 갓 들어온 꽃나무를 가치 이상으로 떠받드는 이국취향이 드러난다. 그들의 유교적 세계관과 사대주의, 관존민비의 잔재들이 답답한 한계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오늘날 우리나라 지식인들 또한 먼 훗날 세대들에게 얼마나 한심하게 보일 것인가.
담양=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 사진=구성찬 기자 ichthu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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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항 논설위원의 '그 숲길 가보니'] 담양 원림(園林)에 흩날리는 배롱나무 꽃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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