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11일 선교/뉴스.
남자현(1872~1933) 선생은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흔치않은 여성 독립투사다. 양반집 규수였던 선생은 의병이었던 남편의 전사를 계기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국내에서 활동하다 47세에 만주로 망명해 서로군정서에 가입하는 등 14년간 항일무장투쟁에 헌신했다.
중국 지린성 옌지시 옌볜과학기술대 한국어과 김종식(57) 교수는 선생의 증손자다. 한국에서 태어난 김 교수는 1993년 옌볜과기대 창립 멤버로 증조할머니의 피와 땀이 배어 있는 이 땅으로 건너왔다. 지난달 21일 옌지의 한 찻집에서 만난 김 교수는 증조모의 삶이 독립투사뿐 아니라 신앙인의 측면에서도 조명되길 소망했다.
“증조할머니는 24세 때 남편을 잃은 이후 돌아가실 때까지 평생 변절하지 않고 철저하게 기독교 신앙에 기반을 두고 독립운동을 하셨습니다. 서로군정서에서 활동하면서도 만주에 교회 12곳을 세우고 여성계몽을 위한 여자교육회도 설립하셨습니다. 중년 여성의 몸으로 일제 요인 암살에 나서고 손가락을 잘라 독립의지를 천명하기도 하셨지요.”
선생은 경북 영양의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 19세 때 김영주와 결혼했다. 선생의 부친 남정한은 통정대부를 지낸 인물로 70여명의 문하생을 두고 있었다. 남편 역시 경북 안동 유학자 집안의 자제였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시국을 개탄한 남편은 을미의병전투에 나섰다가 목숨을 잃었다. 졸지에 과부가 된 선생은 유복자인 아들 김성삼을 낳은 뒤 시부모를 모시고 양잠을 하며 살림을 꾸렸다.
선생은 살림을 하면서도 틈틈이 영양 지역 독립투사들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3·1운동은 선생이 독립운동에 본격 투신한 계기가 됐다. 이 무렵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인 선생은 3·1운동 직전 서울 연희전문학교 인근 교회에서 여성 교인들과 함께 ‘조선선언격문’을 낭독하는 등 만세운동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일제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는 무장투쟁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그해 3월 9일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 랴오닝성 퉁화현에 정착한 선생은 서로군정서에 입단한 뒤 군사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여성계몽 운동과 전도에 앞장섰다.
“증조할머니는 지린성 룽징의 한 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한 뒤 전도활동에 나섰습니다. 조선인 마을을 찾아다니며 여성을 모은 뒤 전도와 계몽을 함께 하셨지요. 퉁화현을 중심으로 12곳에 예배 모임, 즉 교회가 생겼습니다. 아쉽게도 현재는 그 흔적을 찾기 힘듭니다. 1992년 룽징을 방문했을 때 증조할머니가 다니셨던 신학교를 수소문했지만 ‘문화혁명 때 다 타버렸다’는 소식만 들었습니다.”
선생은 만주 독립운동세력들의 연합을 위해서도 힘을 쏟았다. 1922년 만주 항일무장투쟁 단체들이 지역과 이념에 따라 갈라져 무력충돌을 빚었을 때, 선생은 한 주 동안 금식기도를 한 뒤 단합을 호소하는 혈서를 써서 이들에게 보냈다.
독립군 지원에 주력하던 그가 직접 무장투쟁의 최전선에 나선 건 1927년 ‘지린사건’ 때문이다. 1926년 베이징에서 좌·우 항일세력을 결집한 도산 안창호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이듬해 지린을 방문했다가 지린성 당국에 무더기로 체포됐다. 선생은 비상대책반을 구성해 지린성 당국을 설득하고 옥바라지에도 힘썼다. 그의 구명운동에 힘입어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에 넘겨지기 전 중국에서 석방됐다.
선생은 1926년 사이토 조선총독 암살을 시도하고 1932년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을 잘라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고 혈서를 쓴 뒤 만주를 찾은 국제연맹조사단에게 전달하는 등 목숨을 아끼지 않고 독립투쟁을 펼쳤다.
선생은 일제의 혹독한 고문과 감옥생활에도 지조를 꺾지 않았다. 1933년 일제 만주국 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를 암살하려다 부하의 밀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 선생은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의 감옥에 갇혔다. 6개월간 고문에 시달리던 선생은 같은 해 8월 6일 “일제가 주는 건 더 이상 먹지 않겠다”며 금식을 선언한 뒤 같은 달 22일 순국했다.
임종 전 아들 김성삼과 손자 김시련을 만난 그는 중국돈 249원80전을 전달하며 ‘200원은 조선이 독립하는 날 정부에 독립축하금으로 바치고 나머지는 손자의 대학 진학에 써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밀고자에 분노하던 아들에게는 ‘절대 원수를 갚지 말라. 원수는 하나님께 맡기고 너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군에 입대하라’는 말을 남겼다.
김성삼은 조국독립을 위해 군에 입대하는 등 어머니의 유언을 모두 지켰다. 선생을 밀고했던 부하는 6·25전쟁 중 죽었지만 아들은 전쟁 당시 중공군에 붙잡혀 1년 넘게 포로생활을 했음에도 기적적으로 살아 남았다. 김 교수는 이것이 증조모의 기도 덕분이라고 믿는다.
“중국인들은 자주 제가 왜 이곳에 왔는지 묻습니다. 그때마다 ‘가족을 대표해 감사를 전하러 왔다’고 해요. 증조모께서 안창호 선생 구명운동을 할 때 중국인들이 돕지 않았다면 독립운동은 큰 타격을 입었을 겁니다. 앞으로도 감사의 빚을 갚는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중국인 제자를 키울 겁니다.”
옌지=양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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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손자 김종식 옌볜과기대 교수 증언으로 들은 독립운동가 남자현 선생 삶과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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