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항 논설위원의 ‘그 숲길 다시 가보니’] 곧고 흰 나무들이 펼쳐내는 순백의 치유 공간

Է:2015-02-09 20:11
:2015-02-10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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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항 논설위원의 ‘그 숲길 다시 가보니’] 곧고 흰 나무들이 펼쳐내는 순백의 치유 공간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 숲]

자작나무에는 여러 가지 모순적 이미지가 중첩돼 있다. 귀하고 이국적인 나무로 느껴지지만, 실은 주변에서 정원수 등으로 흔히 볼 수 있다. 여성적이고, 날씬하다 못해 가냘프면서도 영하 80도의 추위를 견딜 수 있는 강인함을 지녔다. 시베리아와 백두산을 상징하는 북방계 나무지만, 남한에서도 강원도 인제와 평창 등 강원산간지방에 부분적으로 자생한다. 남한 곳곳에 자작나무 인공림이 있는데다 자작나무과 자작나무속의 박달나무, 물박달나무, 사스레나무, 거제수 등 4촌들은 우리나라 산들에 고루, 많이 분포하기 때문에 결코 낮선 나무가 아니다. 자작나무 줄기의 껍질은 기름 성분이 많아 얇게 벗겨내 불을 붙이면 ‘자작자작’ 소리를 내며 잘 탄다. 반면 자작나무 잎은 좀처럼 불이 붙지 않는다.

◇ 포근한 숲, 국내 최대 자작나무 군락
평안도가 고향인 시인 백석은 1930년 여행한 함경도의 풍광을 자작나무를 통해 그려냈다.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은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같이 단 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보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백화(白樺)’ 전문)
지난 3일 인제군 인제읍 원대리 자작나무 숲의 품에 안겼다. 겨울 자작나무 숲은 포근했다. 올 겨울이 좀 따뜻한 편이기도 하지만, 지난달 중순 이후 눈마저 끊겨 쌓인 눈이 많이 녹은 덕분이었다. 138㏊(약 40만평)에 이르는 원대리 자작나무 조림지는 자작나무 군락으로는 국내 최대규모이고, 1991년부터 3~4년간에 걸쳐 조성됐다. 동행한 인제국유림관리소 송동현 주무관은 “자작나무의 잎은 수피와 달리 불이 잘 붙지 않기 때문에 산불이 나무에서 나무로 번지는 것을 막아준다”면서 “자작나무를 심은 데는 산불확산 방지라는 목적도 있다”고 말했다.

◇ 눈 속에서 더욱 돋보이는 귀부인
입구의 자작나무 숲 안내소에서부터 비교적 넓은 임도를 따라 올라가면 초입부터 신갈나무, 물박달무, 박달나무들 사이로 군데군데 자작나무 숲을 볼 수 있다. 눈이 녹고 있지만, 곳곳이 빙판이라서 탐방객들 일부는 아이젠을 착용했다. 원대리의 원대봉(해발 800m) 일대는 소나무와 활엽수들이 자생하는 곳이었으나 산림청은 소나무재선충이 크게 번지면서 죽어가는 소나무들을 베어내고 자작나무 4만 그루를 심었다. 처음엔 무슨 흰 꼬챙이를 꽂아 놓은 듯 했겠지만, 20여년이 흐른 지금 높이는 평균 20m, 가슴높이 지름이 평균 14㎝에 이를 정도로 컸다. 송씨는 “높이로는 거의 다 자랐고, 이제는 더 굵어질 일만 남았다”고 말했다.
하얗게 빛나면서 매끈한 수피를 지닌 자작나무는 여성적, 귀족적 이미지를 지녔다. 정비석은 기행수필 ‘산정무한’에서 금강산의 자작나무를 가리켜 “비로봉 동쪽은 아낙네의 살결보다도 흰 자작나무의 수해(樹海)였다. (…) 자작나무는 무슨 수중공주(樹中公主)이던가”라고 읊었다. 자작나무는 임도 옆 일부 자연림의 물박달나무와 박달나무가 같은 자작나무과 자작나무속인데도 수피가 갈색이거나 검고, 너덜너덜 갈라지는 것과 대조적이다. 암·수꽃이 피는 4월, 새순이 파릇파릇 돋는 5월초, 연두색에서 노란색으로 단풍이 드는 10월 중순도 좋지만, 자작나무는 역시 흰 눈과 하나가 되어 푸른 하늘로 날카롭게 치솟는 겨울이 가장 좋다.

◇ 관광 명소로 탈바꿈한 조림정책 실험장
3.2㎞의 임도를 1시간 남짓 걸으니 ‘속삭이는 자작나무 숲’에 도착했다. 25㏊에 이르는 이 조림구역은 유아 숲 체험원의 숲 속 교실, 생태연못, 인디언집, 자작나무 그네 등 가족단위 탐방객들이 즐길 수 있는 최소 단위의 시설을 갖췄다. 이곳은 원대봉 정상 능선의 동쪽 사면에 자리 잡아 바람피해가 거의 없기 때문에 자작나무들이 높이 24m, 가슴높이 지름 30㎝까지 자랐다. 숲 한 가운데 들어서니 사방에 흰 방한복에 스키를 신은 산악특수부대의 열병식을 보는 듯했다. 송씨는 “이곳이 계곡 습지라서 5~6월쯤에는 큰앵초, 박새, 애기나리 등 야생화가 지천”이라고 말했다. 순백의 낭만을 가슴 속에 품기 위해 이곳을 찾은 방문객은 지난 한 해에만 11만5000명. 2012년 탐방 편의시설을 갖춘 이후 방문객은 매년 2배씩 늘고 있다. 송씨는 “지난 1월 한 달 동안 1만3400명이 방문해 올해도 방문객이 배증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조림지는 대개 일본잎갈나무(낙엽송), 잣나무, 삼나무 등 침엽수 위주였다. 산림청은 활엽수도 조림에 활용해 보자는 생각으로 재질이 단단한 자작나무를 선택했다. 역시 경제림 개념이긴 했지만, 낙엽송 등의 속성수와는 달리 자작자무는 40년을 키워야 가슴높이 지름이 40㎝정도로 자라 목재로 가치를 지닌다. 따라서 이런 저런 목적이 뚜렷했다기보다는 당시 정원수나 장식용으로 인기를 끌던 자작나무를 “그냥 한번” 심어보자는 식이었다고 한다. 박치수 인제국유림관리소장은 “자작나무 조림은 조림정책의 전환에 따른 것이었지만, 경관 목적을 넘어 관광 명소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 수난 겪는 숲 속의 팔방미인
인제국유림관리소는 2011년부터 관내 유치원들과 협약을 맺고 유아들에게 자연체험 학습프로그램을 실시해 왔다. 여기에 참여한 학부모와 선생님들이 자작나무 숲이 좋다는 글과 사진을 블로그에 올리면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많을 때에는 주말 하루에 3000~4000명이 몰리다 보니 폐해도 드러나고 있다. 사진작가들이 야생화를 훼손하고, 탐방객들이 ‘천년을 견딘다는’ 사랑의 편지를 쓰기 위해 자작나무 수피를 벗겨 내거나 수피에 하트 모양과 이름 등 온갖 낙서를 한다. 2월말~3월 중순에는 자작나무 수액채취가 기승을 부린다. 산책이건 휴양이건 간에 자연에 흔적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된다. 송씨는 “원대리 자작나무 숲도 결국 탐방예약제를 실시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자작나무의 껍질은 흰 종이처럼 벗겨지고 몇 겹으로 쌓여 있다. 잘 썩지 않는데다 방수효과가 있어서 백두산 근처의 너와집 지붕으로 많이 사용됐다. 또 종이가 없던 시절에는 화피(樺皮)라 하여 종이 대용으로 쓰기도 했다. 두꺼우면서도 부드러워 신발의 뒤창에 붙여 사용하거나 칼집, 말안장 등을 만들기도 해 쓰임새가 매우 다양했다. 최근 국립산림과학원 조사에 따르면 자작나무 수액과 수피에는 노인성 치매 예방과 뇌신경 기능 강화에 좋은 성분이 있다고 한다.

◇ 순백의 힐링 공간, 아름다운 치유의 숲
결혼식을 올리는 것을 흔히 화촉을 밝힌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화촉은 한자로 아름다울 화(華)자를 쓰기도 하지만, 원래 자작나무 화(樺)자를 썼다고 한다. 초가 없을 때 기름기가 많은 자작나무 껍질에 불을 붙여 혼례를 치른 데서 유래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 일부도 자작나무로 만들었고, 경주 천마총에서 출토된 천마도도 자작나무에 그려진 것이다. 다 큰 자작나무는 건축 내장재와 가구재로 인기가 높아 고가에 팔린다. 산림청은 자작나무 조림지의 간벌을 최소해 휴양·관광을 위한 선도적 숲으로 키워가기로 했다.
내려가는 도중 동쪽에서 석양을 받은 설악산 귀때기청봉을 봤다. 귀때기청봉이 보이는 날이 거의 없다는데, 이날 가시거리가 25㎞ 이상임을 알 수 있다. 해는 저물어 가는데 한 모자(母子)가 올라가는 길을 재촉한다. 아마 입학이나 취업, 혹은 그 실패를 계기로 먼 데서 온 듯하다. 송씨는 “탐방객의 80%가 여성”이라고 말했다. 자작나무가 날씬한, 다이어트가 필요 없는 미인의 아이콘 아니던가. 그들 중 상당수가 인생의 고비에서 생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오는 게 아닐까. 자작나무 숲에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묘한 힘이 있다.
인제=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 사진=구성찬 기자 ichthus@kmib.co.kr

[사진설명](위에서부터 순서대로)
- 곧고 키 큰 하얀 나무가 촘촘히 들어선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 숲 전경 / 자작나무 수피(樹皮) / 푸른 하늘과 어우러진 자작나무 숲 / 소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자작나무 조림지 / 간벌한 자작나무 단면 / 자작나무의 수난(좌·우) / 자작나무 숲의 석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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