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재훈 목사의 기독교 미술사] 4) 오토왕조의 미술(Ottonian Art)

Է:2014-09-18 11:26
:2014-09-18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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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로마제국을 계승해 기독교를 기반으로 서유럽에서의 보편제국을 이룩하고자 한 카알대제(Karl der Grosse, Charlemagne)의 카롤링거 왕조는 그의 사후 제국의 분열과 노르만족, 마자르족의 침입으로 붕괴되었다.

그러나 카알대제가 구상하였던 기독교제국의 이상은 동프랑크왕국의 오토대제(Otto I. der Grosse, 912-973)가 주후 962년 신성로마제국을 수립하고 서구 기독교세계의 새로운 구원자로 황제(Kaiser)에 즉위함으로 지속되었다.

이는 19세기 초까지 존속한 ‘독일민족의 신성로마제국’(Heiliges Roe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 962-1806)의 시작이었으며 유럽교회만이 지닌 국가교회(Staatskirchentum) 전통의 출발을 의미한다.

10세기 중엽부터 11세기 초 오토왕조는 카롤링거왕조 붕괴 후의 정치적 혼란기를 극복하고 서유럽 전역의 문화를 주도하였는데 이 시기의 미술양식을 오토왕조의 미술(Ottonian Art)이라고 부른다.

오토왕조의 미술은 초기에는 카롤링거 양식의 미술 전통을 부활시키고자 하였지만 동시대의 비잔틴 양식을 수용함으로 이전 시대와는 다른 새롭고도 독창적인 양식을 형성한다.

오토왕조의 미술은 본격적인 로마네스크 미술로 넘어가는 과도기 미술양식으로서 로마네스크를 예비하였다는 의미에서 ‘전기 로마네스크 양식’(Pre-Romanesque/Vorromanik)으로 분류한다.

한편 오늘날의 독일과 이탈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라인강 동쪽에 세워진 신성로마제국과 달리 라인강 서쪽 지역에서는 위그 카페(Hugues Capet, c. 940-996)가 서프랑크왕국을 계승해 987년 프랑스의 전신인 카페왕조를 연다.


2. 새로운 제국의 출범 후 오토왕조(Ottonian dynasty, 919-1024) 최대의 과제는 9세기 카롤링거 르네상스에 버금가는 국력의 회복과 문예의 진흥, 기독교의 보급이었다.

당시 라이헤나우 수도원(Kloster Reichenau)에서 제작된 필사본의 채색화는 이 일을 이룩한 오토 3세(Otto III.)의 업적을 나타낸다. 오토 3세 복음서(Evangeliar Otto III.)라고도 불리는 이 책에 실린 삽화(Buchmalerei)는 카알대제 이래 선왕들이 구현하고자 한 세속적 국가권력과 교회의 영적 권위의 통합이 그의 치적임을 강조한다.

삽화 중앙의 오토 3세는 교회 권위의 상징인 목장과 세속권력의 상징인 보주를 양손에 들고 왕좌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의 좌우편에는 각각 2명의 대주교와 제후들이 그를 보위하고 있다.

대주교들은 고전시대 학문의 전수자로서 한손에 책을 들고 있고 다른 손으로 왕좌를 짚으므로 오토왕조와 교회와의 연계를 나타낸다. 제후들은 권력과 군사력의 상징인 창과 칼을 들고 오른손을 들어 황제에 대한 충성을 표현한다.

왕좌에 앉은 오토 3세의 왼쪽에는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지배지역이 의인화된 네 여인의 모습으로 묘사되어있다. 이 여인들은 공물을 들고 옥좌를 향하고 있는데 여인들의 머리 위에 각각 스클라비니아(슬라브), 게르마니아(독일), 갈리아(프랑스), 로마(이태리) 라고 적혀 있다.




(사진1) 오토 3세 복음서(Evangeliar Otto III.), 라이헤나우 화파(Reichenauer
Schule), 998-1001년경, 독일 뮌헨 바이에른 국립도서관


2. 힐데스하임(Hildesheim)의 베른바르트주교(Bischof Bernward)는 신성로마제국의 이상과 통치이념을 건축과 조각, 청동주물 작품으로 표현하였다.

그는 세 살의 나이에 재위에 오른 오토 3세의 스승이자 재상으로서 성직자 관료국가인 오토왕조 내 권력의 핵심이었다.

기념비적인 건축물으로 제국의 이념을 표현하는 미술행위는 고전 그리스·로마의 정신과 연결되는 것으로 서로마제국 멸망(476년) 이후 진정한 의미에서 야만의 시대가 종식되었음을 의미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된 성미카엘교회(St. Michaelis)와 대성당(Dom)의 청동문 조각, 청동주물 기념주는 당대의 시대정신을 이끈 교회의 신학을 기독교미술을 통해 표현한 그의 작업의 산물이다.


3. 성미카엘교회는 오토양식의 대표적인 건축물로서 양교차부와 각 측랑의 끝에 탑을 세움으로 모두 6개의 탑이 있는 다탑식 구성으로 엄격한 대칭구조를 이룬다. 천장은 목재로 덮여있고 후에 채색되었다.

또한 동서 양단에 내진(Chor/choir)이 있는 독일 특유의 이중내진식(Doppelchor) 평면의 모범이다.

동쪽 내진에는 주제단이 위치하고 서쪽 내진에는 반지하에 납골당을 두었다. 그럼으로써 동·서 양쪽의 내진은 각각 동쪽은 영적인 세계와 교회의 권위를 서쪽은 세속의 세계와 국가의 권위를 상징함으로 두 권력의 통합을 추구한 신성로마제국의 이상을 나타내었다.

이러한 이중내진은 후에 독일 로마네스크양식의 특징을 이루는데 서임권논쟁 이후 교황권과 황제권, 교회권과 세속권의 긴장관계를 반영한다.




(사진 2) 성미카엘교회(St. Michaelis), 1110-1133년, 독일 힐데스하임(Hildesheim)




(사진 3) 성미카엘교회(St. Michaelis) 내부, 종교개혁이후 개신교 예배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성미카엘교회가 취하고 있는 장방형 바실리카형식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대제는 카타콤에서 지상으로 나온 교회 건축물을 세우면서 이교의 신전을 연상시키는 고전적인 신전양식을 의도적으로 배제하였다. 그는 전통적으로 제국의 법이 시행되던 건물인 바실리카(Basilika, 공회당)를 개조함으로 교회와 국가 간의 연계를 강화하였다.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세워진 유스티니아누스황제의 성소피아 대성당(Hagia Sophia)은 옛 로마와의 차별성을 두기 위해 장방형의 교회건축물 위에 돔을 씌우는 중앙집중식 형태를 취하였다.

고전시대의 부활을 시도한 카알대제 조차도 자신이 서로마제국의 계승자임을 의식해 아헨에 세운 궁정예배당(Pfalzkapelle)을 라벤나(Ravenna, 서로마제국의 옛 수도)의 산비탈레교회(San Vitale)를 모델삼아 입방체적 형태로 짓는 데에 그친다.

이제 알프스 이북지역에서 로마제국의 계승을 표방한 오토왕조 시대에 초기 기독교 건축형식인 바실리카양식이 회복된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성미카엘교회는 고대 바실리카 형식의 단순한 부활을 넘어 새로운 공간개념을 시도함으로 독일 로마네스크 교회건축양식의 전형(Prototype)을 이루었다.

성미카엘교회에서 시작된 이 양식은 쉬파이어 황제대성당을 거쳐 보름스 대성당에서 완성을 이룬다. 전술한 것처럼 오토왕조기에 나타난 이 건축형식을 미술사에서는 전기 로마네스크 양식(Pre-Romanesque)으로 분류한다.

로마네스크 양식이라는 명칭은 11세기 중엽에서 12세기까지 유럽의 건축물들이 두꺼운 벽과 반원아치(round arch)를 사용하는 고대 로마의 석조건축과 닮았음을 가리켜 ‘로마와 같은’(romanesque)이라는 뜻에서 나온 용어이다.


4. 성미카엘교회 부근의 성모 대성당(Dom)에는 오토왕조 양식의 부조 조각을 담은 청동문과 청동주물 기둥이 세워져 있다.

청동문에는 좌우 양쪽에 각각 8개씩 모두 16개의 사각형 안에 구약과 신약성서의 인간창조와 타락, 그리스도의 탄생과 구원의 장면을 담은 부조가 새겨져 있다.

특별히 왼쪽 문 네 번째 프레임에는 원죄를 지적하는 하나님의 손길에 대해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하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책임을 회피하는 아담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하와 역시 뱀을 가리키며 변명을 하고 있다. 결국 그 아래 다섯 번째 프레임에서 아담의 변명하는 손가락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내쫓는 그룹의 손가락으로 이어진다.

베른바르트의 문(Bernwards Tuer)에 새겨진 이 청동부조상은 오토왕조 미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등장인물의 모습이 미적으로 비례에 어긋난다 할지라도 인간 내면의 죄와 책임을 회피하는 죄인의 모습을 묘사한 불후의 명작이다.



(사진 4) 베른바르트의 문(Bernwards Tuer, 1015년)의 청동 부조, 성모 대성당 (Mariendom), 독일 힐데스하임(Hildesheim)




(사진 5) 베른바르트의 문에 대한 도상학적 해설(Iconograpy)




(사진 6) 베른바르트의 문 세부, 아담과 하와의 변명,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1015년,
성모대성당(Mariendom), 독일 힐데스하임(Hildesheim)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으시자 아담은 하와를 하와는 뱀을 가리키며 책임회피를 하고 있다. 인간의 원제에 대한 주제가 분명히 표현되고 있어서 인물들의 모습이 자연적으로 묘사되지 않았음에도 그것을 간과하고 전달하는 메시지에 주목하게 된다. 독일 로마네스크 조각의 특징인 표현주의적 경향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 책이 하는 역할을 그림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 해 준다’는 6세기 말 그레고리 대교황(Gregor der Grosse)의 가르침(Pictura est laicorum scriptura)을 조각 분야에서 완벽하게 구현한 예이다.

베른바르트의 기념주(Bernwards Saeule)는 고대 로마제국의 트라야누스황제의 전승 기념주(Trajanssaeule)를 본떠서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록한 기념주이다. 이제 황제의 공적을 칭송하는 대신 그리스도의 구원의 이야기가 찬양된다.

오토왕조시대에 제작된 기념비적인 미술작품들은 기독교가 유럽문화의 토대가 된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사진 7) 베른바르트의 기념주(Bernwards Saeule, 1020년 경), 성모 대성당
(Mariendom), 독일 힐데스하임(Hildesheim)




(사진 8) 로마 시내에 있는 트라얀황제 전승 기념주(Trajanssaeule, 110-113년)
다키아원정을 기념해 트라얀 포룸(Forum Traiani)에 세웠다.


5. 고대로부터 중세로 이어지는 이 시기의 회화미술은 성경 필사본에 수록된 삽화미술(Buchmalerei)에 의해 그 명맥이 유지되었다.

오토왕조시대의 라이헤나우 수도원(Kloster Reichenau)에서 제작된 작품들은 카롤링거 르네상스기에 고대를 모범으로 시작한 삽화미술이 오토왕조기에 와서 고유의 형식과 색조를 지닌 독자적인 양식을 이루었음을 보여준다.

하인리히 2세 황제가 밤베르크 대성당을 봉헌하면서 기증한 예배 시 봉독되는 성서구절을 모은 책(예배서, Perikopenbuch Heinrich II.)에 실린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는 오토왕조기 삽화미술의 절정이다.

라이헤나우 화파(Reichenauer Schule)는 황금색 바탕을 독일미술에 도입하였으며 세속을 초월한 영원한 것을 표현하는 데에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넓은 단색의 공간을 사용하였다.

채색도 보이는 세계의 색채가 아닌 흰색과 배합된 차가운 색채를 통해 초공간적이며 초시간적인 비공간(Un-Raum)의 세계를 구현하며 파스텔조의 색상을 통해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탈공간화된 단색의 배경에서 흰색이 배합된 옥색 옷을 입은 제자들에게 같은 색깔의 옷을 입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

왼손에 생명의 책을 든 그리스도는 오른손을 들어 제자들을 축복하는데 십자가 고난을 상징하는 붉은 색 겉옷이 불꽃처럼 흔들리며 바람에 날리므로 제자들에게 임할 성령으로 다시 오리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사진 9)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그리스도, 하인리히 2세의 성서구절 모음집(예배서, Perikopenbuch Heinrich II.), 1007-1014년, 라이헤나우 화파(Reichenauer Schule), 독일 뮌헨 바이에른 국립도서관




임재훈 독일 칼스루에벧엘교회 목사
jejastg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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