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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풍향계-최태산] ‘심리적 재난’도 심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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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로 대한민국이 대리적 외상 증후군에 빠져 있어 정부 대책 시급”

지난 한 주, 지구촌에서 제일 깊고 슬픈 바다는 전남 진도 앞 맹골수도였다. 진도 팽목항에서 바라본 바다는 그야말로 슬픔의 바다다. 종종 비가 올 때면 더 그랬다. 오열하는 실종자 가족들과 자원봉사자들, 군경들의 행렬에다 국내외 취재진으로 북적대고 있으나 슬픔의 바다 때문인지 어수선하다는 느낌마저 가질 수 없다.

장관, 국회의원, 총리에 이어 대통령까지 왔건만 진도 실내체육관이란 통곡의 깊은 바다 앞에서는 존재감이 없었다. 거기서는 모두가 죄인이다. 첫날엔 우리 편과 남의 편 혹은 혼나는 자와 혼내는 자로 구별이 되는 듯싶었는데, 조금 지나니 너 나 할 것 없이 죄인일 수밖에 없는 부끄러운 존재가 돼 버렸다. 분노에 찬 목소리에 깜짝 놀라 긴장할라치면 곧바로 “제발, 우리 아이들 좀 살려주세요”라는 애절한 읍소로 변한다. 무거운 침묵에 짓눌려 숨이 막힐 즈음, “아빠! 어서 와봐”란 20대 여성의 외침에 우르르 출구 쪽으로 시신을 확인하러 휘몰아 가는 그곳에서는 그냥 모두가 누구누구가 아닌 한 점 바람이다.

지난 17일 안산 단원고 교장과 교사들이 실종자 가족들에게 용서와 사과를 하기 위해 체육관 무대 위에 섰다. 실종자 가족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온 다음 사과를 하든 말든 하라”며 분노를 표시했다. 어디선가 “무릎 꿇어”라는 목소리가 나오자 선생님들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교장은 수학여행 인솔 책임자인 교감이 여기까지 왔지만 소심한 사람이라 책임감과 죄책감에 여기에 서지 못했다고 사과할 기회를 달라고 읍소했다.

그들이 퇴장하자 나는 본능적으로 상담원들에게 교장선생님 좀 뵙자고 전했는데 급히 떠나서 만나지 못했다. 교사들을 위한 상담치료 준비에도 착수했다. 그리고 다음날, 강민규 단원고 교감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비보를 접했다. 멍했다. 정말 나 자신이 한심하고 죽고 싶을 정도의 자책감에 잠을 못 이루었다. 분명히 예측할 수 있던 일을 넘겨버리다니. 내가 상담심리 전문가는 맞는지 무척이나 힘들었다.

지금 대한민국은 나를 포함해 재난의 당사자가 아닌데도 간접 경험으로 인해 ‘외상후 스트레스(PTSD)’에 빠지는 현상인 국가적 바이케어리어스 트라우마(Vicarious Trauma·대리적 외상 증후군)를 겪고 있다. 우리 땅, 우리 앞바다에서 손을 뻗으면 금방 들어올릴 것만 같은 세월호를 보면서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채 싸늘한 시신만 한 구, 두 구 세고 있는 한심함과 무력감이 온 국민의 마음을 마비시킨 것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40대 부모와 고2 자녀를 둔 가정의 사회심리적 특수성을 이해한다. 온 가족이 오랜 시간 대입을 위해 정진하고 이제 수학여행이라는 달콤한 여행 뒤 본격적인 고3을 다짐하는 여행 아닌 여행. 경제적 위기와 양극화 등으로 지쳐 있을 대로 지쳐 있는 40대 가정에 예고 없이 덮친 이번 참변의 상처는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몸으로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감수성 풍부한 어린 학생들을 포함해 살아남은 이들, 자식을 눈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잃어버린 사망·실종자 가족 등 피해 당사자의 대리 외상이 대한민국의 구석구석에 들불처럼 타오르는 이유다.

청소년들의 경우 동년배인 고교생들이 “객실에서 대기하라”는 말만 믿고 따랐다가 변을 당한 것을 보고, 고교생 자녀를 둔 학부모들의 경우 ‘우리 아이도 저런 사고를 당할 수 있겠구나’라는 공감 능력이 발동하면서 이들 역시 심리적으로 고통과 불안을 겪고 있다. 문제는 이런 충격이 평생 지워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다른 연령층에서도 유사한 증상을 보이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정부 차원의 대책이 시급하다.

인재 혹은 관재에 가까운 재난에 분노하고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사실에 무기력했다가 곧바로 일상에 복귀하곤 했던 모습은 우리 사회에서 낯설지 않다. 하지만 이번만은 정말 아니었으면 싶다. 아니, 아니어야 한다. 언제까지 똑같은 대가를 반복해 지불할 것인가.<진도에서>

최태산 전국재난심리지원센터 연합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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