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 대륙 장보고기지 건설로 진정한 극지연구 가능해져”
미국 유학시절 우연히 남극 연구가를 만났다. 그의 권유로 1983년 남극에서 현장조사를 벌였다. 김예동(60) 극지연구소장과 남극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김 소장은 30년 넘게 남·북극 연구가의 외길을 걸었다. 그가 남극에서 보낸 세월과 추억, 일군 업적은 한국 남극연구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5년 가까이 남극 대륙기지건설단장을 맡아 동분서주했다. 지난 12일 마침내 남위 74도에 장보고과학기지가 위용을 드러냈다. 장보고기지 준공식에 참석하고 귀국한 김 소장을 지난 20일 국민일보에서 만났다.
-세종과학기지가 남극 진출 1막을 열었다면 장보고기지는 2막을 연다고 할 수 있다.
“본격적인 남극 연구의 첫걸음을 뗀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남극점 주변에 과학기지를 세우는 것이 극지 연구원들의 바람이다. 현재 남극점과 주변에 연구원이 1년 내내 상주하는 과학기지는 3곳, 여름에만 머무르는 비상주(하계) 과학기지는 2곳이 있다. 상주 기지는 미국과 러시아가 1곳씩, 프랑스·이탈리아가 공동으로 1곳을 운영한다. 남극 진출에 심혈을 기울인 미국이 정확히 남극점에 과학기지를 세웠고, 러시아 등이 주변에 터를 잡았다. 일본과 중국은 각각 비상주 기지를 1곳씩 갖고 있다. 중국이 비상주 기지를 세우는 데 20년이나 걸렸다.”
-왜 그렇게 오래 걸리는가.
“남위 80도 이하에 있는 내륙 기지에서 남극점으로 가는 길을 개척하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 대부분 내륙 기지에서 남극점까지는 1000∼1200㎞에 달하는 얼음길을 헤치고 가야 한다. 곳곳에 크레바스(빙하 표면에 생긴 깊은 균열)가 있고, 탐사할 수 있는 남극 여름이 짧고, 시도 때도 없이 악천후가 계속된다. 중국이 첫해에 개척한 ‘차이나 루트’가 50㎞에 불과하다. 이듬해에 100㎞를 개척하는 식이다. 극한 상황에서는 이미 개척한 길도 눈에 묻히면 새로 길을 내야 한다. 남극점 주변에 우리 기지를 세우려면 장보고기지에서 남극점까지 1200㎞에 이르는 빙하에 ‘코리안 루트’를 뚫어야 한다. 아무리 서둘러도 최소한 8년은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남극점 주변에 과학기지가 필요한 이유는.
“남위 90도나 주변에 있는 과학기지에서 학문적으로 가치 있는 기상·빙하 자료 등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남극점 주변에 과학기지를 건설한다면 비상주 기지로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 장보고기지를 준공했다. 세종기지와 장보고기지의 임무와 역할은 어떤가.
“세종기지는 육상·해양 생태계를 중심으로 기후변화 반응과 민감도를 연구한다. 반면 장보고기지는 빙하·대기과학·우주기상·고층대기·우주생물·운석 연구 등을 할 수 있다. 진정한 의미의 극지연구가 장보고기지 건설로 가능해졌다.”
-두 기지 주변의 환경을 비교한다면.
“세종기지는 남위 62도, 장보고기지는 남위 74도에 있다. 불과 12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환경은 너무 다르다. 연간 평균기온은 세종기지가 영하 1.7도인 반면 장보고기지는 영하 14.13도에 달한다. 세종기지는 30㎞ 이내에 외국의 상주 기지가 8곳이나 있는데, 장보고기지는 가장 가까운 상주 기지가 350㎞나 떨어져 있다. 세종기지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극야(極夜)와 백야(白夜)를 볼 수 없는데, 장보고기지에서는 극야 95일, 백야를 100일간 관찰할 수 있다. 문명세계로부터 떨어진 거리가 세종기지는 1000㎞인 데 비해 장보고기지는 3200㎞나 된다. 장보고기지가 훨씬 오지에 있다.”
-환경 차이만큼 기지 대원의 선발 기준이 다른가.
“장보고기지 1차 월동대원을 뽑을 때 기초체력 검정과 건강검진을 상당히 강화했다. 세종기지는 공중보건의를, 장보고기지는 정형외과 전문의를 각각 선발했다. 응급환자가 생기면 세종기지는 주변에 있는 칠레 기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장보고기지는 스스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장보고기지는 3∼9월에는 외부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다. 이 기간에는 쇄빙선도 갈 수 없고, 헬기도 띄울 수 없다.”
-장보고기지가 중요한 이유는.
“세종기지는 남극 최북단 킹조지섬에 있어 극지연구 활동 범위가 좁았다. 선진국과 함께 극지연구를 수행하는 데도 어려움이 많았다. 장보고기지가 이런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연 것이다. 빙하 시추를 통한 과거 기후 분석, 장기적인 기후 변화 전망, 이산화탄소 등 대기성분 관측 등을 보다 정교하게 할 수 있다. 장보고기지는 영하 40도의 극한 기온과 초속 65m 강풍에도 안정적으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친환경 과학기지로 건설됐다. 시설 면적이 4458㎡에 달하고 최대 60명을 수용할 수 있다.”
-남극에서 자원 개발을 자유롭게 할 수 있나.
“남극조약에 따라 영토권을 주장할 수 없고, 2048년까지는 지하자원 개발이 금지된 상태다. 다만 생물자원은 지금도 개발할 수 있다.”
-생물자원을 활용한 개발 사례가 있는가.
“극지연구소가 ‘라말린’이란 물질로 특허 등록을 했다. 이 물질은 남극의 강한 자외선과 저온에서 살아남은 생물로부터 추출한 것이다. 피부 노화를 막는 데 효과가 있다. 국내 업체가 이 특허를 이용한 화장품을 출시해 소비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과학기지를 남극에 건설하려면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하나.
“세종기지를 건설할 때는 과학연구만 하면 가능했다. 그런데 1990년대 말부터 조건이 까다로워졌다.”
-어떻게 달라졌는가.
“기지 건설을 희망하는 나라는 남극에 관한 의사결정권을 행사하는 국제기구 ‘남극조약협의당사국회의(ATCM)’에 환경영향평가서를 제출해야 한다. ATCM 회원국 가운데 한 나라라도 반대하면 기지를 건설할 수 없다. 기지 건설과 운영 과정에서 남극의 자연환경을 훼손하지 않고 보호할 것이라는 점을 회원국들에 주지시켜야 한다. 우리나라는 2012년 6월 ATCM 회원국들이 만장일치로 동의해 장보고기지를 건설하게 됐다. 세종기지를 운영하면서 회원국들과 친목을 도모하고 신뢰를 얻은 것이 주효했다. 어떤 나라는 수년씩 기지건설 계획이 지연된 적도 있다.”
-대륙기지건설단장으로 장보고기지 건설을 총괄했다. 난관과 에피소드가 많았을 텐데.
“가장 큰 난관은 열악한 환경에서 건축한 전례가 없다는 점이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무한도전의 연속이었다. 특히 남극 여름철에 건설자재를 선박에서 하역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아라온호는 두께 1m의 얼음을 깨도록 설계한 쇄빙선이다. 그런데 얼음 두께가 1m인 상태에서는 무게 100t인 기중기를 하역할 수 없다. 그래서 설계 기준을 초과한 두께 2m가량의 얼음을 깨기로 결정했다. 아라온호가 수없이 앞뒤로 항해하면서 지난한 쇄빙작업을 벌였다. 그리고 나서 1만5000t에 달하는 건설자재들을 해빙(海氷) 위에 하역했다. 해빙 두께가 녹아서 얇아지기 전까지 시간과의 사투를 벌였다. 10일 동안 2교대로 240시간을 쉬지 않고 건설자재를 날랐다. 기중기에서 짐을 싣고 내리는 데 쓰이는 40t짜리 붐(Boom)을 분리했다. 몸체와 붐을 나눠서 옮긴 것이다. 두께 2m인 얼음이 중장비 중량을 지탱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혹시라도 얼음이 깨져서 사람이 남극해에 빠질 위험에 대비해 구명환을 비치하고 작업했다.”
-안전사고는 없었나.
“경미한 사고가 한 번 있었다. 50대 인부가 차에서 자재를 내리다 발을 헛디뎌 땅으로 떨어졌다. 대퇴부 골절을 당했는데 이것 말고는 안전사고가 없었다. 지난해 1월 아찔한 경우는 있었다. 장보고기지 건설을 지휘한 곽임구 현대건설 현장소장이 헬기를 타고 350㎞ 떨어진 미국 기지로 가다가 기상악화로 절벽에 불시착한 적이 있다. 다행히 헬기를 수리하고 위기를 넘겼지만 아주 위험한 순간이었다.”
-장보고기지 부근에 육상 활주로를 만든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육상 활주로가 필요하기는 하다. 장보고기지에서 1㎞ 떨어진 곳에 맨땅이 있다. 바람이 하도 세게 불어 1년 내내 눈이 쌓이지 않는 곳이다. 하지만 독자적으로 활주로를 운영하는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 건설비가 만만치 않고 활주로 건설 이후에는 20명의 관리인원을 둬야 하며 유류 저장소 등 유지비도 많이 든다. 그래서 장보고기지에서 8㎞ 떨어진 곳에 있는 이탈리아 하계기지와 공동으로 육상 활주로를 짓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탈리아는 20년 동안 해빙 활주로를 운영한 노하우를 갖고 있다. 우리와 공동으로 육상 활주로를 만드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남극과 인연을 맺은 것은 언제부터인가.
“미국 루이지애나주립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1983년이었다. 학과장 소개로 남극 연구가를 만나 미국의 남극연구 프로그램에 동참했다. 그해 10∼12월 남극 현장조사에 참여했다.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남극 땅을 밟은 것이다. 당시 남극 연구가는 ‘남극을 방문한 사람은 반드시 남극에 다시 온다’고 했다. 나는 귓등으로 들었다.”
-결국 남극을 다시 찾지 않았나. 월동대장을 두 번이나 맡았는데.
“1987년 한국해양연구원에 들어오면서 그렇게 됐다. 장순근 박사는 네 번이나 월동대장을 지냈다. 두세 번씩 월동대원을 한 사람은 수두룩하고, 다섯 차례 월동대원을 한 사람도 두어 명 된다. 장보고기지 1차 월동대원 15명 가운데 10명이 세종기지 월동대원 출신이다. 어느 월동대보다 경험이 많기 때문에 잘할 것으로 기대한다.”
-지금까지 남극에 얼마나 있었나.
“7년 이상 될 것이다. 지난 30년간 하계 연구대원으로 남극을 찾았다. 모두 합치면 60개월쯤 된다. 그리고 2차, 9차 월동대장 때 각각 1년씩 머물렀다.”
-가족이 싫어했을 텐데.
“(웃음) 남극 여름철인 12∼1월에는 집에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더라. 결혼하고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국내에서 보낸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러다가 월동대장으로 선발되면 1년씩 집을 비웠다.”
-월동대원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문명세계로부터 격리된 데 따른 고립감, 외로움, 불안감 등일 것이다. 몸이 아프거나 다치면 특히 그렇다. 하지만 인터넷의 발달로 가족과 친지와의 화상 대화는 국내에 있을 때보다 훨씬 잦아졌다. 그전에는 국내에서 오는 편지나 엽서를 받아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다른 나라 기지대원들과 교류할 수 있지 않은가.
“만나기는 한다. 그러나 가족과 친구를 만날 때와는 기분이 사뭇 다르다. 국내 같았으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 하나를 소개하겠다. 한국과 중국 기지대원이 만나 회포를 풀었다. 둘 다 외국어를 하지 못했다. 우리 대원은 한국어로, 중국기지 대원은 중국어로 번갈아가며 밤새 대화한 적이 있다. 대원들의 외로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만남이었다. 장보고기지는 여름철을 제외하면 기지 밖으로 나갈 수조차 없다. 아마 세종기지 대원들보다 더욱 고립감을 느낄 것이다.”
-아라온호 한 척으로는 남·북극의 연구를 수행하기 어려울 텐데.
“정말 그렇다. 아라온호는 지금도 항해일수가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박근혜정부가 표방한 북극종합정책을 수행하기 위해서도 제2의 쇄빙선은 필수 인프라다. 아라온호는 뉴질랜드∼남극해, 제2 쇄빙선은 우리나라∼북극해 구간을 각각 전담하게 해야 경제적이다. 오는 5월쯤 제2 쇄빙선 건조와 관련한 최종 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할 예정이다. 제2 쇄빙선은 아라온호보다 성능을 개선시킬 계획이다. 특히 북극항로 시대가 열린 만큼 제2 쇄빙선의 필요성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극지연구와 관련해 정부에 건의하고 싶은 것은.
“극지연구는 완전히 순수과학이다. 투자하면 곧바로 성과가 나오는 분야가 아니다. 단기적인 성과를 기대하거나 그런 시각으로 평가하면 극지연구소 역할과 기능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정부가 거시적인 안목을 갖고 장기적으로 투자하는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세종기지 건설에 가장 큰 도움을 준 대통령을 꼽으라면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전 전 대통령의 집권 과정과 통치술에 대해서는 상반된 평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정치적인 문제를 차치하고 세종기지 건설에만 국한하면 전 전 대통령의 공이 가장 크다. 1988년 세종기지를 건설할 때 55억원이 들었는데, 당시로서는 만만찮은 예산이었다. 전 전 대통령이 결심했기 때문에 최소한 10년 이상 앞당겨 세종기지를 건설할 수 있었다. 지난 12일 준공식을 마친 장보고기지를 건설하는 데 1067억원이 들었다.”
-전 전 대통령이 세종기지 건설을 결정하면서 조크를 했다고 하던데.
“전 전 대통령이 ‘시중에서는 나를 보고 부동산 투기를 많이 했다고 말들이 많은데, 남극에 세종기지를 건설하도록 재가한 것이 나의 첫 부동산 투자’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선배들한테서 들었다.”
김예동 소장 프로필
△서울고 △서울대 자연대 학·석사 △미국 루이지애나주립대 지구물리학 박사 △세종기지 2·9차 월동대장 △대한지구물리학회장 △초대 극지연구소장 △남극 대륙기지건설단장 △국제남극과학위원회 부회장(현) △4대 극지연구소장(현)
염성덕 논설위원 sdyum@kmib.co.kr
정정 보도문
본보는 지난 2월 26일자 12면 ‘건설단장으로 남극 탐사 새 지평 연 김예동 극지연구소장’이라는 제목의 인터뷰 기사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남극 땅을 밟은 사람이 김예동 박사라고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1963년 고 이병돈 박사가 한국인 최초로 남극대륙(알미란테 브라운 기지)을 방문한 사실이 자료를 통해 확인됐기에 이를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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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人터뷰] 건설단장으로 남극 탐사 새지평 연 김예동 극지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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