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유승관] 독일 교회의 신앙유산과 영적 리더십이 주는 교훈(하)
헤른후트에서 세계로!(From Herrnhut into the World)
- 모리비안 형제교회로부터 배워야 할 세계선교의 비전-
△헤른후트와 친젠도르프
헤른후트(Herrnhut)는 독일과 체코, 폴란드 국경에 인접한 작은 마을이다. 비록 인구 6000명에 불과한 이 작은 동네 헤른후트와 18세기 이곳의 영주였던 친젠도르프(Zinzendorf)는 개신교 교회사와 선교사에 길이 남을 불멸의 주인공들이다. 헤른후트는'하나님의 피난처' 혹은 '오두막'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1722년 당시 목공이며 마을의 지도자였던 크리스챤 다비드(Christian David)에 의해 친젠도르프 백작의 협조로 공동체의 성격에 맞도록 기획, 설계 되었다.
친젠도르프는 작센주 드레스덴의 백작 가문의 아버지 게오르그 루드비히 친젠도르프와 어머니 진로테 사이에서 태어난다. 그가 유아세례를 받을 때 슈페너가 대부가 될 만큼 그의 부모와 외할머니까지 경건주의에 심취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어머니는 그를 데리고 외할머니가 있는 영지로 돌아간다. 어머니의 재혼으로 외할머니에게 맡겨진 친젠도르프는 프랑케의 김나지움 교육 과정에 입학하게 된다. 그곳에서 프랑케와 함께 지내면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그와의 깊은 유대관계 속에 특히 할레 재단의 선교 지원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게 된다.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그는 신학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자신에게 붙은 '비합법적 평신도 설교자'라는 오명을 씻기 위해 신학협의회에서 시험을 치렀고, 34살의 나이에 튀빙엔 대학에 신학 지망생으로 정식 등록하였다. 신학 과정 중 당시의 풍습에 따라 졸업여행으로 독일과 네델란드, 벨기에, 영국, 프랑스등 여러 나라를 방문하면서 당시 영국의 청교도주의, 프랑스의 얀센주의(Jansenismus), 네덜란드의 엄숙주의(Praezisismus)에 대해 견문을 넓힌다. 이 여행 중 그는 뒤셀도르프에서 도메니코페티의 작품 '에케 호모(이 사람을 보라)'라는 예수 수난장면의 그림을 보고 평생을 주님의 십자가와 동행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평소 "누구든지 하나님을 머리로 아는 자는 무신론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었더라면 나는 무신론자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세계선교를 향해 큰 빛을 발한'헤른후트의 별'
1722년 성년이 된 친젠도르프는 오버라우지츠의 영지를 물려받아 관리하게 된다. 이 때에 모라비아 지역(현재 체코) 합스부르크 왕가의 강한 개종 정책을 피해 피난을 온 보헤미안 모라비아형제단 사람들의 간청에 따라 자기의 영지의 한 부분을 내어주어 피난민 공동체를 세우게 한다. 이것이 바로 "Herrnhut, A Small Town, Global Importance!"로 소개되는 헤른후트 모라비안 공동체의 시작이다.
필자는 헤른후트 박물관과 모라비안형제교회, 친젠도르프 묘역 등 마을의 구석구석을 둘러보면서 남다른 감동과 도전을 받았다. 박물관의 수많은 사진들과 여러 가지 물품들은 당시 모라비안선교의 발자취와 흔적을 더듬어 헤아리기에 충분하도록 잘 보관되어 있었다. 각종 농기구와 재봉틀과 같은 기계류, 여러 형태의 옷과 직물류, 금, 은, 주석 등을 소재로 하여 만든 각종 장식구들과 주방 용품, 차(茶)와 약재 등 생활에 전반에 필요한 수많은 제품과 제조 기술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을 전하며 총체적 선교의 삶을 실천한 모라비안 형제들이야말로 이미 3백여 년 전에 '전(全)신자 선교사주의'를 실천한 선각자들이었다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했다.
오늘날 평신도전문인 선교의 효시를 이룬 18세기초 위대한 선교사들의 삶과 헌신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그 작은 자가 1000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사 60:22)"는 말씀이 떠올랐다. 작은 마을 헤른후트에서 파송된 적은 선교사 모라비안 형제들은 진정 주님의 지상명령을 위해 세계를 향해 큰 빛을 발한 '헤른후트의별'(Herrnhuter Sterne)이었다.
△모라비안 형제교회로부터 배워야 할 세계선교
드레스덴 왕궁에서 5년간 왕실 법률고문으로 일하던 친젠도르프는 1727년 헤른후트로 이사하여 176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33년동안 공동체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후 그를 중심으로 헤른후트에서 꽃피운 실천적 경건주의 운동과 성육신적 선교의 삶은 개신교 선교사에 길이 남을 금자탑을 이루었다.
1727년 8월 13일 성찬식 도중에 강한 성령의 역사가 임했고 이를 계기로 공동체에는 설교와 찬양, 기도 등이 살아나고 새로운 예배의 전례와 치리를 위한 방법론이 제시된다. 당시 루터파의 정통 교회와 여타의 경건주의 교회가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면, 헤른후트의 교회에서는 성령님과의 직접적인 교제와 인격적인 변화 속에서 지상 교회의 본질인 선교 사명을 실천했음을 알 수 있다.
모라비안형제교회의 선교는 개신교 안에서 최초로 일어난 자발적인 평신도 선교 운동이었다. 근대 선교 역사상 처음으로 파송교회가 선교의 책임자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놀라운 것은 형제단 교회는 하나님의 뜻으로 믿었던 추첨(제비뽑기)를 통해 형제들 가운데 파송할 사람과 선교지를 정했다. 모라비안 형제교회는 작은 마을 헤른후트에서 인도와 러시아, 그린랜드, 미국, 남아프리카 희망봉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에서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 선교의 사명을 완수했다. 당시 덴마크의 '할레 교회'가 덴마크의 식민지인 인도로 선교지로 제한하면서 18세기 전반에 걸쳐 60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반면, 헤른후트의 형제교회에서는 전 세계에 226명의 자비량 선교사를 파송했다.
△'하나님의 영지(God's Acre)'
헤른후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소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필자는 두 곳을 들고 싶다. 하나는 모라비안 형제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모라비안 선교사 묘역이다. 필자는 모라비안교회의 예배당에 들어가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직사각형(Rectangle) 모양(강단에서 볼 때 앞뒤보다 좌우가 훨씬 더 긴 구조)의 예배당은 벽과 의자까지 전부 하얀색 페인트가 칠해져 순결한 느낌을 주었고, 예배당 안에는 그 어떤 치장이나 장식도 없이 단지 중앙에 놓여진 강대상과 왼쪽 편에 설치된 파이프 오르간이 전부였다. 강대상의 탁자 서랍을 열어보니 그 속에는 성경책과 찬송가만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수 있는 분위기가 확 느껴졌다.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고 외친 바울의 아덴(Athen) 설교를 떠올리며, 오늘날 크고 화려한 예배당을 사모하는 한국교회의목회자들이 꼭 와보아야 할 곳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나님의 영지(Gottesacker)'라는 이름의 모라비안교회 묘역의 아치형 돌문 상단에는 "예수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Jesus istauferstanden von den toten)"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이곳에는 친젠도르프를 비롯해 1732년 이 교회에서 서부 인도로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 레온하르드 도버(Leonhard Dober)와 다비드 니츠만(David Nitschmann),이듬해 그린랜드로 파송한 크리스천 다비드(Christian David)를 비롯한 모라비안 선교사들과 가족 그리고 성도 약 6500여구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다.
구 동독 시절, 온갖 잡초와 숲으로 뒤덮여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된 이곳을 복원하기 위해 독일 교회가 모금 운동을 벌여 이제는 아름다운 수목들과 함께 묘역을 잘 정비하여 '하나님의 영지'라는 이름에 걸맞게 탈바꿈시켰다. 백작으로서 얼마든지 안락한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부르심에 순종하여 이 땅에서 자기 부인의 삶을 살다가 영원한 본향으로 돌아간 친젠도르프 백작과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 필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유럽 속의 한국 선교,세계 속의 코리안 디아스포라선교
필자는 이번 독일과 유럽 방문을 통해 지난 수년 동안 사랑의교회 제자훈련 지도자(칼) 세미나를 받고 간 현지인 교회와 신학교 지도자들과의 만남 그리고 고 옥한흠 목사의 저서인<평신도를 깨운다>독일어판 출간을 위해 오랫동안 기도와 수고를 아끼지 않은 대학생성경읽기회(UBF) 유럽지부의 페터 장 박사를 비롯한 많은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삶과 선교 사역의 풍성한 열매를 목도하고 큰 도전과 함께 소망을 가질 수 있었다. 1969년 세 명의 여성 간호사들이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로 독일에 첫발을 디딘 후 UBF유럽의 선교는 지난 44년동안 독일을 비롯한 유럽 23개국에서 복음을 위해 흘린 땀과 눈물의 기도에 비례하는 오병이어의 기적과 열매를 거두었다.
"유럽의 새로운 영적 각성과 부흥역사를 위하여", 마치 18세기 모라비안 선교회처럼 자비량선교사로서 지성의 산실인 캠퍼스를 중심으로 일대일 성경공부와 현지인 제자훈련에 최선을 다한 결과, 신(新)사도행전적 믿음의 역사와 성육신적 선교의 귀한 열매를 거둠으로써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세계선교 비전과 타문화권 전문인자비량선교의 가능성, 차세대 세계선교 리더십의 역할에 대한 비전과 확신을 가질 수 있게 했다.
자존심과 자긍심이 넘치는 독일 캠퍼스의 지성을 상대로 언어와 문화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열매를 거두고 있는 UBF 유럽의 선교에 대해 피터바이엘하우스와 같은 저명한 신학자도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한국 교회의 선교 사명에 대해 큰 기대감을 나타냈다. 필자는 독일의 캠퍼스 선교를 통해 현지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들고 그들이 또 다른 충성된 자들을 제자 삼게 하는 놀라운 '복음의 4세대 사역'의 현장을 보면서,'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주님의 지상명령은 선교사로서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잃은 양(羊)을 위해 가시덤불을 헤매는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섬기는 삶을 통해 열매를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유승관 목사(선교전략가·SIM International consult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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