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유승관] 독일 교회의 신앙유산과 영적 리더십이 주는 교훈(중)

Է:2013-06-19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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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비전과 확신에 거하라!(Vision und Gewissheit )

- 경건주의 운동과 프랑케의 교육사상이 주는 교훈-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과 교회 개혁

1618년부터 1648년까지의 '30년 전쟁(der Dreissigjaehrige Krieg)'으로 인해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제국은 초토화되었다.파괴된사회적 재건과 피폐된 정신적 회복은 전후 유럽이 직면한 최대의 과제였다. 1670년 독일 개신교안에서 형성된 경건주의운동은 경건성과 교회의 철저한 갱신을 위한 신앙운동이었다. 이 운동은1690~1740년 사이 약 반세기에 걸쳐절정을 이루어 신학에서부터 교회의 전 분야와 예배의식, 개인의 경건생활에 이르기까지 확고한 틀을 갖추게 한다. 교회사적으로 경건주의는 '신앙고백'시대를 종식하고, '정통주의'의 통치를 근절시키는 족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교회안에서 새로운 조류와 나침판 역할을 감당하였고 19세기에 와'각성운동'과 '공동체운동'을 통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했다.

요한아른트(Johann Arndt)로 부터 시작된 경건주의 운동은 슈페너(Ph. J. Spener),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 진젠도르프(Nikolaus Ludwig von Zinzendorf) 등 신실한 지도자들에 의해 17~18세기 독일 교회와 사회전반에 걸친 개혁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청교도주의의 영향을 받고 자라난 경건주의는 종교개혁 이후 교회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교회개혁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경건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슈페너는 루터 이후 '제2의 종교개혁'을 이루었다고 평가 받을 정도로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그는 앞서 루터교회의 정통교회 안에서 개혁을 주도했던 지도자들이 경건한 성도의 삶을, 모든 민족 교회와기독교 전분야에 걸쳐 실천하려는 의지와 노력을시도하지 않은 점을 간과하지 않았다.

정치 지도자들을 위시한 권력층과 목회자, 일반 성도의 세 가지 계층으로 나누어서 개신교의 내적 부패를 확인한 그는 이 모든 부패의 원인이 바로 '살아있는 신앙의 결핍'에 있음을 직시하고 "7대 개혁안"을 제시했다. 그 중 개혁을 위한 가장 중요한 첫번째 제안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더 많이 가져오자!"는 것이었다. 성경읽기와 경건 모임에서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와 성도들간의 대화를 통해 그것을 구체화할 필요를 느낀 그는 '성경이 모든 개혁의 실질적인 구현을 위한 유일무이한 근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는 '경건주의'를 하나의 '성경운동'(Bibelbewegung)으로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 외의 개혁을 위한 제안들은 '모든 성도들의 만인제사장설의 구체화', '이론보다는 실천의 강조', '교파 간의 신학적 논쟁의 제한', '실천적 경건(Praxispietatis)에 중점을 두는 신학 수업개혁', 그리고 '설교의 초점 변화 즉 '내적 변화'를 겨냥한 경건에 설교의 방향이 맞춰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슈페너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자신의 백성들의 교회에게 영광스러운 미래를 약속하셨기 때문에 이러한 제안에 근거하여 교회개혁이 가능하다는 믿음과 확신을 가졌다. '참된 기독교'를 위해 '교회 속의 작은 교회(Ecclesiola in ecclesia)'인 '경건한 성도의 모임'과 더불어 '성령운동'과성경과 경건 서적을 통한 '문서운동'으로 대변할 수 있는이 운동은 전 교회가 함께 참여하고 함께 이룩하는 '전 성도 참여운동'이었으며 동시에 종교개혁이 외친 '만인제사장'의 실질적인 구현이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보여주고 있는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들을 바라보면서 이를 정화하고 척결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개혁의 귀감이요 행동강령이라고말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케의 교육사상과 인재 양성

이같은 독일의 경건주의는 슈페너의 씨뿌림에 이어 프랑케에 의해 꽂을 피우고 친젠도르프에 의해 열매를 거뒀다고 말할 수 있다. 경건주의는 독일의 신학과 교육 사회전반에 있어서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은 이론과 구호에만 그친 단기적이고 과시적인 운동이 아니라 실제와 실천을 중요시 하며 장기 지속적으로 이어져서 사회를 발전시키고 개혁하는 건강한 열매를 거두었다는 데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 운동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국가의 백년대계인 교육 체계를 확립하고 각 분야의 인재를 양성하는데있어서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람이 바로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이다.

프랑케는 각 분야의 인재를 키우는 인문계 중등교육기관(Gymnasium)을 세우는데 크나큰 공헌을 한다.독일의 교육 체계는 기초학교(Grundschule)를 마친 다음 실과학교(Realschule) 및 주요학교(Hauptschule) 등으로 진입(進入)하는 학생과 김나지움으로 진학하는 학생이 나눠진다.그는 경건주의의 이론적 체계를 정립하였을 뿐만 아니라할레(Halle)에 고아원과 김나지움를 설립하여 사회 각 분야를 이끌어갈 전문가를 키우는 교육사업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산업발전에 기초가 되는 과학, 의학, 화학, 공학 등 전문기술교육을 중요시하고 기독교의 사회 참여와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특히 할레(Halle)를 중심으로 전개된 프랑케의 교육 혁명과 이 학교 출신들의 사회 각 분야에 걸친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독일 사회전반에 걸쳐 엄청난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그가 주창한 교육의 기본사상은 경건성과 덕성이다. 이 같은 그의 교육 철학과 이념은 독일인의 근면성과 선행을 위한 덕성을 키우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기독교인은 마땅히 모든 선행에 앞서야 하고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을 바라볼 때,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들보다 더 유익한 사람을 찾아볼 수 없다고 기꺼이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인의 경건성은 미래에 가질 직업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므로 이를 위한 실제적이고 전문적인 실물 교육을 구현함으로써 독일의 산업발전을 이루는데 있어서 커다란 공헌을 했다.

필자는 프랑케박물관 앞에서 한국에서 이곳 할레(Halle)로 유학을온한 청년을 우연히 만났다. 그는 할레 대학(마틴루터대학)에서 특수교육학(LehramtanFoerderschulen)을 전공하고 있었는데, 교육학, 언어장애교육, 학습장애교육 등 총 9학기 과정 중2학기째 공부하고 있었다. 그에게 유학 소감을 물어보았더니, 독일에서 공부한지 아직 1년반 밖에 안되어서잘 모르지만, 자신이 느낀 점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첫째는 실습을 중요시 하는 교육방식이다. 교수로부터 일방적으로 듣는 이론적인 수업보다는 조별 토론과 교육의 현장인 학교에서 적용할 수 있는 여러가지 프로그램과 역할극, 장애아동에 대한 영상 또는케이스 스터디를 통한 분석, 수업계획표 만들기 등 다양하고 실제적인 수업방식을 통해 배우고 경험할 수 있다는 점, 또한 학부 간에 협력 시스템이 잘 구축되어 있다.

예를 들어 언어장애 교육학을 배우는데 있어서 이비인후과에 대한 의학적 지식이 필요할 경우에는 의과대학과 연계하여 의대교수들에게 직접 배우고, 독일어는 언어학과 연계하고, 다른 전공들도 필요한 학과와 연계하여 배울 수 있도록 학교내의 연계 교육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는 점. 그리고 대학과 지역사회 간의 긴밀한 협력이다. 며칠 전 독일 북부에 큰 홍수가 나서 할레에도 큰 피해가 있었는데, 3일반 동안을 휴교하여 학생들이 수해지역 복구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장려하였고,대부분의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지역사회와 학교와의 협력과 끈끈한 유대감을 갖는 감동적인 모습을 통해 교육의 참 목적과 귀한 열매를 느껴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비전과 확신(Vision und Gewissheit)

프랑케는 당시 루터교회의 정통주의에 맞서 목회자, 신학자, 교육자, 영혼의 위로자, 전략가로서 30년 이상을 할레 지방에서 혼신을 다해 헌신함으로써 '할레 경건주의(der hallischePietismus_)'라는 위대한 교육 사상과 유산을 남겼다. 필자는 프랑케 교육 사상의 산실이자 실습장이었던 할레의 프랑케 재단을 방문하면서 종교는 물론 정치, 경제,산업, 사회,철학, 문화 예술 등 전 분야에 걸쳐 걸출한 영향력을 발휘한 지도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시운을 타고 저절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독일이 음악분야에서 베토벤, 슈베르트, 헨델, 브람스, 바하, 정치 철학분야에서 니체,칸트, 칼막스, 헤겔, 괴테, 쉴러, 하인리히, 토마스 만, 과학분야에서 구텐베르그, 폰 훔볼트, 아인슈타인, 의학분야에서 뢴트겐,츄제 등 다방면에 걸쳐 인류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을 배출했고, 20세기 초 노벨상의 45%를 수상하고 세계 자연과학 문헌의 80% 이상이 독일어로 돼있을 만큼 학문적 명성이 높았던 것은 모두 교육의 힘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은 사람을 키우는 일에 인색하다. 기업은 인재 제일주의를 표방하며 사람을 키우는 일에 열심을 내는데 반해 교회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말은 하지만 잘 키우지 않는다. 담임목사는 설교, 티칭, 어린이 교육, 문서, 전도, 선교 등 사역자들의 은사를 계발하여 전문 목회자로 키우는 일이 자신과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득이 되는 것을 알지만 그런 일에 힘과 돈을 쓰지 않는다. 독일과 독일 교회로부터 배우고 풀어야 할 숙원 과제이다.

구 동독 시절, 공산당은 프랑케가 남긴 고귀한 교육 유산을 철저히 유린하고 말살시켰다. 그들은 학교 건물을 농구 코트와 같은 체육관으로 사용하였고 심지어 고아원을 마구간으로,경작지를 돼지방목지로 사용했는데, 바로프랑케의 교육 사상과 기독교 정신을 말살하고 유물사상을 주입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통독이후 독일 정부와 프랑케 재단은 이 고귀한 무형의 유산과 교육 시스템 복원을 위해 전 세계 할레 출신의 리더십과 네트워크를 연계하여 장기적인 비전과 확신에 찬 발전적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필자는 할레대학의 입구와 캠퍼스 곳곳에 걸려있는 "비전과 확신(Vision und Gewissheit)'의 구호를 바라보며, 독일이 오늘날 유럽 속의 독일, 세계 속의 독일인으로서 21세기 신(新)경건주의 운동을 펼쳐나가기 위해 새롭게 '독일 국민에게 고함'을 외치고 있음을 목도할 수 있었다.

유승관 목사(선교전략가·SIM International Consult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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