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오성삼 (7) 병세 호전됐지만 임관 못하고 이등병 입대

Է:2013-02-24 17:01
ϱ
ũ
[역경의 열매] 오성삼 (7) 병세 호전됐지만 임관 못하고 이등병 입대

1971년 10월 15일.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문교부와 국방부 공동으로 대학생 군사교육 문제를 놓고 전국 대학총·학장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곳에 탄원서를 들고 갔지만 들어가지 못했다. 그길로 나가 중앙청 주변 목공소에서 피켓을 만들어 1인 시위를 시작했다. 나는 출동한 중앙청 경비대에 붙잡혀 종로경찰서로 호송됐고 유치장에서 그날 하룻밤을 지냈다. 다음날 아침, 즉결심판에 넘겨지기 직전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종로경찰서 출입기자 4명이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들에게 그간의 억울함을 털어놓았다.

“나는 대학에서 2년간 ROTC 후보생으로 훈련받았던 사람입니다. 임관을 앞두고 질병 때문에 임관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임관할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하는데 이제 병세가 회복되어 입대 영장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2년간 훈련과정을 모두 무효로 하고 논산훈련소 신병 과정부터 시작해 사병으로 모든 복무 기간을 마쳐야 한다는 국방부의 조치를 받은 것입니다.”

ROTC 제도가 생겨난 이후 지난해까지 나처럼 질병에 걸려 임관할 수 없는 경우 ROTC로 복무하는 기간만큼 하사로 복무하도록 되어 있는데 갑자기 과거 훈련 과정에 대해 아무것도 인정해주지 않도록 규정이 바뀌었다. 금년부터 제도가 바뀌었다면 그 규정은 새로 훈련받는 사람들부터 적용돼야지 규정을 소급 적용한다는 것은 너무 억울한 일이었다. 그래서 1인 시위까지 벌이게 된 것이다.

대학시절 교련 교육을 이수한 사람도 복무기간을 3개월 단축해주는데 2년간 ROTC 훈련을 받아온 사람에게 그간 훈련 과정을 단 하루도 인정해줄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는 응암동에 있는 지방법원으로 넘겨져 결국 즉결심판에서 벌금을 물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저녁나절 몇몇 신문에 나에 대한 기사가 실렸고 어머니는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맞아주셨다. 당시 내 사례는 5·16 이후 미국 대학생들에게 실시되는 예비역 장교 양성 제도를 국내 대학에 들여온 ROTC 사상 최초의 억울한 희생 사례가 되었던 것 같다.

그날 겪었던 부당한 제도의 폐해는 다행스럽게도 이듬해 개정되었지만 새로 개정된 제도는 그 효력이 소급 적용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결국 장교 훈련을 마친 나는 논산훈련소에 입대해 신병 훈련을 받았으며 복무기간을 모두 채우고 전역해야 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2년 뒤인 스물다섯 살에 비로소 이등병 계급장을 달았다. 장교 훈련을 마친 내가 나이 어린 병사들 틈에 끼여 군생활을 하기란 쉽지 않았다. 1주일에 한 번 어머니가 보내주시는 편지는 말할 수 없는 위로가 되었다. 편지 내용은 대부분 성경을 인용한 것이었다. 특히 욥이 자신의 잘못과 상관없이 원치 않는 어려움을 인내한 결과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는 구약성서 내용이었다. 무엇보다 나를 감동시킨 어머니 편지는 우체국에서 우표 열 장을 사서 한 장은 편지에 붙이고 나머지 아홉 장을 동봉해주시던 어머니의 마음이었다. 내가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도록 배려해 주신 것이다. 나의 마음 시린 군생활 3년을 데워준 것은 내무반의 난로보다 따뜻함이 묻어나던 어머니의 편지들이었다. 어머니의 편지는 군생활을 하는 나에게 출애굽기며 창세기고 잠언이다.

새벽마다 교회에 갈 수는 없지만 한 주일에 두세 번은 탄약고 주변의 말번 보초 근무를 서고 돌아오는 길에 군인교회의 문을 열고 들어가 철모랑 총을 벗어놓고 기도했다.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



GoodNews paper Ϻ(www.kmib.co.kr), , , AIн ̿
Ŭ! ̳?

Ϻ  Ŀ
Ϻ IJ о
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