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웅 목사의 시편] 점입가경(漸入佳境)
이혼율이 높아지는 세상을 보면서 어른들이 종종 이런 말씀을 하신다. ‘옛날에는 남녀가 얼굴도 모르고 결혼했지만, 요즘보다 행복하게 잘 살았지!’ 중매결혼 예찬자들은 이런 논리다. 서로가 잘 모르고 결혼하기 때문에 오히려 결혼 후에 서로를 알아가는 재미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연애결혼이든 중매결혼이든 약간의 시간 차이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인간은 한계를 가진 존재인지라 서로에게 실망감과 식상함을 주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한번은 초등학생 딸이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아빠, 선생님이 이혼하면 안 된다고 하셨어!” “왜?” “어차피 그놈이 그놈이래!” 웃고 넘겼지만 생각하니 뼈가 있는 진리였다. 실로 사람은 그렇다. 만나면 만날수록 어차피 바닥을 볼 수밖에 없는 존재다.
사람만 그러한가? 사실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전부 그렇다. 아무리 아름다운 경치도 그때뿐이다. 중국의 자금성을 보면서 나는 입을 딱 벌렸지만, 근처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감동이 전혀 없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한두 번이다. 피조세계는 그렇다.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신선함과 놀라움과 신비감은 줄어들기 마련이다.
그 반대는 없을까?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놀라움과 신선함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커지는 것 말이다. 있다. 오직 한 가지가 있다. 바로 무한하신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였던 성막은 우리에게 이 힌트를 준다. 성막의 겉은 시커먼 해달가죽이다. 그러나 내부 벽은 총천연색으로 천사를 수놓은 화려한 천이다. 염색기술이 없던 당시에 화려한 색깔의 천은 진귀한 것이었다. 황량한 광야 위에 서 있는 성막을 상상해보자. 겉으로는 볼 것이 없다. 그러나 일단 그 속에 들어가면 전혀 새로운 별천지가 펼쳐진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의 구조’다.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에 보면, 어린 소녀 루시가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사자 아슬란을 만나서 이런 말을 한다. “아슬란! 이전보다 당신이 더 커졌군요!” 그러자 아슬란의 대답이 의미심장하다. “루시, 그건 내가 커진 것이 아니라, 네가 자랐기 때문이란다.” 천재적인 작가의 통찰력을 보라. 루시가 자라면 아슬란은 더 커져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구조다. 우리가 영적으로 자라면 자랄수록,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우리 앞에 계신 하나님은 갈수록 더 크신 분으로 발견되어진다. 점입가경이다. 그 사랑을 정복하면 할수록 내가 정복한 것이 상대적으로 더욱 작아지는, 이 역설이 바로 신앙이다. 그러니 성숙할수록 마음은 더 가난하고 갈급해질 수밖에! 신앙이 식상해지는 것은 하나님을 못 만나고 있다는 증거다. 봄의 문이 열리고 있다. 계절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그동안 닫혔던 하나님과의 만남의 문도 열리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그 속으로 성큼 걸어 들어가면 어떨까?
<서울 내수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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