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오성삼 (4) 가난·질곡의 시절 극복하게 해준 유산은 ‘믿음’

Է:2013-02-19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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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오성삼 (4) 가난·질곡의 시절 극복하게 해준 유산은 ‘믿음’

아버지가 가족에게 남겨준 것은 교회에 들고 가시던 성경책과 찬송가뿐이었다. 미망인이 된 어머니와 장남인 나 그리고 어린 남동생 둘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수많은 날들을 생각하면 뜯어 먹고 살 수도 없는 성경책과 찬송가는 너무 초라한 유산이었다.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역경을 만날 때마다 믿음의 유산이야말로 가장 값진 유산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보육원에서 운영하는 5년제 ‘고등공민학교’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학령기를 놓친 학생들이나 정상적으로 학교에 다니기 어려운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고등공민학교 5학년을 마친 학생들은 6학년 과정을 배우지 못한 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다.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 5년 과정조차 엉망으로 보낸 채 졸업을 하고 중학교 입학시험을 치렀다.

시골중학교의 모집 정원은 2개 학급 120명이었다. 입학원서 마감 결과 122명이 지원했다. 결국 두명만 떨어지는 입학시험을 응시생 122명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치러야 했다. 국어 산수 사회 자연 음악 미술 등 과목별 필기시험을 치렀고 달리기 멀리뛰기 턱걸이 팔굽혀 펴기와 같은 체력장도 치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두 명을 탈락시키기 위해 상당히 비효율적인 입학시험을 치른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일은 합격자 발표였다. 불합격자 두 명만 개별적으로 통보해주면 될 일을 시험을 마친 수험생들에게 다음주 월요일 오전 9시에 발표한다고 했다. 합격자 발표 때문에 불안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드디어 합격자 발표를 보기 위해 수험생 일부와 학부모들이 건물 앞으로 모였다. 120명의 합격자 명단이 벽에 붙었다. 누구도 자신의 이름이 나왔다고 환호하지 않았다. 당연히 나와야 할 이름이었기에 모든 이들의 관심사는 불합격자 두 명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무심히 합격자 명단을 훑어보던 난 갑자기 눈앞이 캄캄했다. 합격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낙방하는 두 명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단 말인가?’ ‘중학교 진학도 못하고 여기서 내 인생 종치는 것인가’ 별별 생각이 다 드는 중에 합격자 명단 끝에 자투리 종이가 붙었다. 보결생 명단이었다. 두 학생의 이름이 붙었는데 첫 번째 이름이 내 이름이었다. ‘보결생’이란 용어는 매우 생소했다. ‘장학생’으로 착각한 나머지 나는 아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보결로 합격했다고 자랑을 하고 다녔다. 속이 타들어가는 사람은 어머니였다.

더 큰 문제는 수석 보결생의 타이틀을 얻어 입학한 시골 중학교에서 내가 점점 궤도를 이탈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게 나의 학창시절이 지나갔다. 학년이 바뀌는 것도 별 의미가 없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어머니는 용단을 내리셨다. 나의 교육을 위해 안흥보육원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어머니는 모자 가정을 위한 시설에 방을 얻고 그곳에서 미국인 선교사들이 보내준 재봉틀을 얻어 의류수선을 시작하셨다. 수년 동안 놀아 노는 것이 지루해질 무렵 시작된 새로운 생활은 나의 학교생활을 정상 궤도로 돌려놓는 계기가 되었다.

어머니가 그 시절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가난과 고통의 빗줄기를 견뎌낼 수 있었던 힘은 기도였다. 자정이 지나서야 비로소 바느질을 끝내고 잠자리에 누우시던 어머니는 새벽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기도를 하셨다. 그 시절 어머니의 처절한 기도는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라기보다 좌절하지 않도록 자신을 격려하는 기도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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