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태자 울고넘던 날도 서리꽃 피었을까… 충북 충주∼경북 문경 이어주는 백두대간 하늘재 고갯길
하늘재 고갯길은 기억한다. 고구려 온달 장군이 하늘재를 되찾기 위해 진격하다 신라군의 화살을 맞고 전사하던 그날을.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상주를 공격하기 위해 흙먼지를 날리며 하늘재를 넘고, 천년사직을 뒤로 한 통일신라의 마의태자가 통한의 눈물을 뿌리며 하늘재를 넘던 그날을. 그리고 고려 공민왕의 피난행렬이 하늘재에서 거친 호흡을 고르던 그날도. 하얗게 얼어붙은 하늘재 고갯길에는 그날의 흔적인 듯 어지러운 발자국들이 화석처럼 꽁꽁 얼어붙어 있다.
고산 김정호는 일찍이 대동여지도에서 ‘산주분이맥본동기간(山主分而脈本同其間) 수주합이원각이기간(水主合而原各異其間)’이라고 했다. ‘산은 본디 하나의 뿌리로부터 수없이 갈라져 나가는 것이고, 물은 본디 다른 근원으로부터 하나로 합쳐진다’는 뜻이다. 길이 산을 만나면 고개가 되고, 길이 물을 만나면 나루가 되는 까닭이다. 그래서 역사의 고비는 길의 연장선인 고개와 나루에 오롯이 각인돼 있다.
끝없이 영토분쟁을 벌였던 고구려와 신라의 접경지역이자 영남지역에서 한양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했던 하늘재는 기록에 등장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갯길로 가장 드라마틱한 역사의 현장이다. 해발 530m 높이의 하늘재는 경북 문경 관음리와 충북 충주 미륵리를 연결하는 옛 고갯길로, 삼국사기는 신라 아달라왕 3년인 156년에 개척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북 영주와 충북 단양을 연결하는 죽령보다 2년이나 앞선 것이다.
계립령, 마목현, 마골산, 지릅재, 대원령, 한훤령 등으로 불려왔던 하늘재 고갯길은 백두대간인 포암산(961m)과 탄항산(856m) 사이의 좁은 협곡. 지금은 충주 미륵리에서 하늘재 정상까지 1.8㎞ 구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포장이 됐지만 옛날에는 하늘재를 중심으로 충주에서 문경까지 50㎞가 좁은 고갯길이었다.
1800여년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는 하늘재 고갯길의 비밀은 남한강 상류의 탄금호에 위치한 중원고구려비에 새겨져 있다.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 위치한 중원고구려비는 남한에 하나밖에 없는 고구려 비석. 입석마을은 예로부터 이름 없는 비석이 서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중국 지린성에 위치한 광개토대왕릉비의 축소판인 중원고구려비는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 재위 때, 또는 장수왕 손자인 문자왕 재위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동네 아낙들의 빨래판 등으로 사용되던 중원고구려비가 1500여 년 만에 햇빛을 본 것은 1979년 4월. 단국대 학술조사단이 심하게 닳아 희미해진 글자에서 ‘고구려왕이 신라왕과 대대로 형제와 같이 지내기를 원하고 이에 신라왕이 공손히 응했다’는 내용을 판독하면서 고대사의 비밀을 풀 열쇠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신라와 낙동강으로 영토를 넓히고자 하는 고구려 사이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고구려 온달 장군은 “계립령(하늘재)과 죽령 북쪽의 땅을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출사표를 던졌으나 한강 유역의 아차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고구려의 마지막왕인 보장왕은 사신으로 간 신라의 김춘추에게 “마목현(하늘재)과 죽령은 본래 우리 땅이니 돌려주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고구려의 최전선 마을인 입석마을에서 남한강 지류인 달천을 거슬러 오르다 3번 국도를 타고 수안보에서 597번 국도로 갈아타면 월악산국립공원 자락에 위치한 미륵리가 나온다. 미륵사지가 위치한 미륵리에서 하늘재까지는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산길. 겨우내 쌓인 눈이 다져져 숲길은 빙판이나 다름없지만 예나 지금이나 호젓하기는 마찬가지다.
후고구려의 궁예는 상주를 공격하기 위해 말을 타고 이 숲길을 달렸고, 반대로 통일신라의 마의태자는 천년사직을 뒤로 한 채 눈물을 뿌리며 이 길을 걸었다. 완만한 경사의 숲길은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소나무들로 빽빽하다. 이따금 솔가지에 쌓인 눈이 녹아내리면서 은가루처럼 흩날린다.
하늘재 가는 길에는 특이하게 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줄기에서 뻗어 나온 가지가 활처럼 휜 모습이 마치 피겨선수 김연아가 상체를 뒤로 젖히고 한 발을 들어올려 손으로 잡은 레이백 스핀을 연상시킨다. ‘김연아 소나무’로 명명된 이 노송은 ‘그대는 원래 천상의 선녀였나’로 시작되는 어느 시인의 시와 함께 충주시의 보호수로 지정돼 지나가는 나그네들에게 미소를 짓는다.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울창하던 숲길이 갑자기 환해진다. 고도가 높은 하늘재가 가까워지자 숲 속의 나무들이 얼어붙은 눈과 상고대로 인해 눈이 부신다. 나무 사이로 하얗게 얼어붙은 포암산이 언뜻언뜻 보이더니 드디어 하늘재 정상이다. 충주와 문경의 경계이자 한때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선이었던 유서 깊은 고개이다.
하늘재 고갯길은 하늘재를 기점으로 문경 쪽은 포장도로이다. 대를 이어 도자기를 만드는 도예가들이 오래전부터 관음리에서 촌락을 이루고 살면서 도로가 좋아졌다. 문경요 등 문경을 대표하는 가마터들도 이곳에 몰려 있다. 도자기 원료인 사토의 질이 우수하고 땔감이 풍부해서다. 그러나 문경이 일찍이 찻사발의 고장으로 뿌리 내린 것은 하늘재와 남한강 수로를 이용해 손쉽게 한양에 도자기를 공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 아달라왕이 하늘재 고갯길을 개척한 이래 1800여 년 동안 고갯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묵묵하게 지켜본 역사의 증인은 다름 아닌 포암산. 정상에서 수직으로 흘러내린 붉은 바위가 마치 큰 베를 펼쳐놓은 것처럼 보여 베바우산으로도 불리는 포암산은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키 작은 소나무와 얼어붙은 눈이 어우러져 그림 같은 설경을 그린다. 그리고 포암산은 비록 한적하지만 하늘재 고갯길에 역사의 발자국을 남기는 사람들을 그윽한 눈길로 지켜보고 있다.
충주·문경=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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