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중첩첩 능선·하얀 안개·분홍색 동녘 ‘탄성 절로…’ 횡성 태기산
횡성의 태기산 줄기를 수놓은 풍력발전기들이 빙글빙글 원을 그린다. 짙은 어둠 속에서 마실이라도 오가려는가. 이 골의 바람이 저 산을 넘고 저 산의 안개가 이 골을 덮는다. 이윽고 하늘을 채색한 암청색 기운이 스러지자 커튼처럼 드리운 옅은 구름이 분홍색으로 물든다. 중중첩첩 포개진 능선 사이로 메밀꽃보다 하얀 새벽안개가 산수화를 그리는 순간이다.
명품한우로 유명한 강원도 횡성은 요즘 코스모스가 한창이다. 황금들판과 이웃한 길섶을 곱게 수놓은 코스모스는 가녀린 몸으로 호젓한 산길을 달리고 한적한 고개를 넘는다. 거울처럼 투명한 횡성호에서 은빛 갈대와 춤을 추던 코스모스가 흥에 겨워 기어코 태기산을 오른다.
태백산맥의 한줄기인 태기산(1261m)은 횡성에서 가장 높은 산. 본래 덕고산(德高山)으로 불렸으나 삼한시대 진한의 마지막 왕인 태기왕이 산성을 쌓고 신라에 대항했다고 해서 태기산(泰岐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둔내IC에서 태기산풍력발전단지의 풍력발전기를 등대삼아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오르면 태기산 정상으로 가는 양구두미재가 나온다.
해발 980m 높이의 양구두미재는 둔내에서 봉평으로 넘어가는 6번 국도의 고갯마루.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 강릉으로 가는 유일한 국도였으나 지금은 찾는 사람이 드문 한적한 도로. 양구두미재는 옛날 어느 선비가 고갯마루의 선친 묘를 이장하기 위해 관을 들어내자 땅속에서 두 마리의 황금비둘기가 나와 고개 너머로 날아갔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곳. 그 후 이 고개를 양구(兩鳩)데미로 부르다 양구두미재로 바뀌었다.
양구두미재에서 군부대가 위치한 태기산 정상까지는 약 4㎞. 포장과 비포장이 교차하는 임도 주변에는 높이 80m의 풍력발전기가 웅웅 소리를 낸다. 어둠 속에서 돈키호테의 풍차처럼 돌아가는 풍력발전기는 모두 20기. 멀리서 보면 바람개비처럼 앙증맞지만 풍력발전기 아래에 서면 40m 길이의 날개가 주는 공포감에 오금이 저린다.
태기산은 태기왕이 신라 박혁거세에 쫓기다 숨진 역사의 현장. 삼랑진 전투에서 패한 태기왕은 이곳 태기산 일대에 폭 1m, 둘레 1840m의 산성을 쌓고 신라군을 맞아 4년간 전투를 벌였으나 끝내 패했다고 한다. 태기산 자락인 송골 골짜기에는 지금도 허물어진 성벽을 비롯해 집터와 샘터가 곳곳에 남아 그날의 아픔을 증명하고 있다.
태기산은 황석영 작가의 대하역사소설 ‘장길산’의 배경이기도 하다. 장길산의 친구 이갑송이 썩은 조정을 뒤엎기 위해 승려들을 모아 훈련시키고 금정굴에서 군자금으로 쓸 위조 엽전을 제작하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조선 중기까지 군사요충지였던 이곳에 군부대가 들어선 것이 우연의 일치가 아닌 이유다.
울긋불긋 단풍이 들기 시작한 태기산의 매력은 남서쪽의 횡성을 비롯해 북쪽의 홍천, 동남쪽의 평창 등 주변의 산과 들, 그리고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소라는 점. 이른 아침 정상의 군부대 아래 도로변에 서면 풍력발전기 너머로 횡성과 홍천의 산하가 구름이나 안개 속에서 변화무쌍한 조화를 연출하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요즘 같은 가을날에는 운이 좋으면 안개 속에서 돌아가는 풍력발전기의 모습을 만날 수도 있다.
하지만 태기산이 연출하는 진경산수화는 군부대 뒤편에 숨어 있다. 철조망을 따라 군부대를 반 바퀴 돌면 시야가 확 트이면서 발아래 ‘메밀꽃 필 무렵’의 고장인 봉평이 펼쳐진다. 해가 뜨기 직전에 메밀꽃처럼 하얀 새벽안개와 중중첩첩 포개진 능선들, 그리고 분홍색으로 물든 동녘 하늘의 구름이 연출하는 한 폭의 수묵화는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풍경.
태기산을 하산한 횡성의 코스모스 꽃길은 산길과 들길을 달려 한강 제1지류인 섬강의 물줄기를 막은 횡성댐을 한 바퀴 돈다. 6개 구간으로 이루어진 횡성호수길은 모두 27㎞. 이 중 갑천면 ‘망향의 동산’에서 출발해 횡성호의 속살을 감상하고 다시 ‘망향의 동산’으로 되돌아 나오는 4.5㎞ 길이의 제5구간이 가장 수려한 경치를 자랑한다.
호수의 굴곡을 따라 조성된 호수길은 코스모스를 비롯한 가을꽃은 물론 갈대와 단풍, 호수에 뿌리를 내린 버드나무 등이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을 그린다. 이따금 물오리가 수면을 박차고 날아오르고 백로는 허허롭게 맴을 돌면서 나르시스처럼 수면에 비친 제 모습에 유혹 당한다. 제4구간인 갑천면 구방리의 수천 평 규모 코스모스 꽃밭은 횡성호와 어우러진 풍경이 이채롭다.
강변에서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꽃길을 달리면 사진작가 원종오씨가 20여년 전부터 자작나무를 심고 가꾼 우천면 두곡리 둑실마을의 ‘미술관 자작나무숲’을 만난다. 전원형 미술관에 들어서면 피부가 하얀 자작나무 400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다. 담쟁이덩굴에 둘러싸인 갤러리는 원종오 작가의 자작나무 작품이 전시된 곳. 바리스타가 직접 로스팅한 커피향을 즐기며 자연 속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즐거움이 횡성 여행의 묘미를 더한다.
이 밖에도 횡성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반해 ‘청태산(靑太山)’이라는 휘호를 내렸다는 청태산자연휴양림, 숯가마 찜질로 유명한 강원참숯, 자작나무숲이 아름다운 숲체원, 그리고 로마네스크 양식의 풍수원성당 등이 코스모스 꽃길과 어우러져 깊어가는 가을을 노래한다.
횡성=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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