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쉬어가는 그 마을, 천천히 가을에 물들다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주무대인 경남 하동 악양들판은 추수를 앞두고 숨이 막힐 정도로 황홀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바둑판처럼 반듯반듯한 황금들판 한가운데서는 부부송으로 불리는 소나무 두 그루가 그윽한 눈길을 주고받고, 산자락에 둥지를 튼 마을에서는 토실토실한 알밤과 주먹만한 홍시가 고샅을 나뒹굴며 가을 풍경화를 그린다.
하동의 악양슬로시티는 지리산 남부능선 끝자락인 형제봉과 동쪽의 칠성봉 및 구제봉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서쪽은 섬진강 푸른 물에 발을 담근 전남 광양의 백운산에 가로막혀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다. 이곳에 둥지를 튼 마을은 30여곳. 예부터 물산이 풍부하고 인심이 후해 거지가 마을을 한 바퀴 돌며 구걸하는 데 1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경관이 아름다워 슬로시티로 지정된 악양면에는 마을을 한 바퀴 도는 슬로시티 토지길이 조성돼 있다. 출발점은 평사리공원으로 불리는 개치나루터. 하동읍내와 화개장터 중간쯤에 위치한 개치나루터는 ‘토지’의 월선이 용이가 보고 싶어 마지막 배를 타고 와 악양들판을 가로질러 평사리로 찾아들던 곳.
푸른 대밭과 금빛 모래밭 사이로 흐르는 섬진강의 숨소리를 뒤로하고 벚꽃터널 길로 유명한 19번 국도에 올라서면 단풍이 들기 시작한 벚나무의 다홍색 잎이 가을햇살에 형광색으로 빛난다. 악양의 마을 중 아름답지 않은 마을은 하나도 없다. 축지리 대축마을은 감나무와 밤나무가 지천인 마을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문암송이 눈길을 끈다. 문암송은 600년생 소나무로 신기하게도 좁은 바위틈에 뿌리를 내렸다.
악양천 제방을 따라 악양들판을 한바퀴 돌다보면 조부잣집이라고 불리는 조씨 고가(古家)가 나온다. 조선 개국공신인 조준의 후손이 정착해 사는 조씨 고가는 어마어마한 식솔과 넘쳐나는 손님들로 늘 밥 짓는 연기가 끊이지 않았던 곳. 조부잣집 쌀뜨물 때문에 섬진강이 뿌옇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으나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모두 불타고 안채만 남았다. 하지만 고풍스러움은 여전하다.
야생차 재배지 중 세계 최초로 슬로시티로 지정된 악양의 지명은 나당연합군을 이끌고 온 당나라 소정방이 이곳의 지형이 중국의 악양과 닮았다고 해서 지었다고 전해진다. 소정방은 평사리 강변 모래밭을 금방, 모래톱 안에 있던 호수를 동정호로 명명했다. 평사리 외둔마을 앞에 위치한 동정호는 둑이 생기면서 바싹 말랐으나 복원공사를 통해 옛 모습을 회복했다.
소설 속의 공간을 재현한 아흔아홉 칸 최참판댁은 평사리 상평마을의 언덕배기에서 악양들판을 다정하게 품고 있다. 돌담이 멋스런 고샅을 사이에 두고 드라마 ‘토지’의 세트장과 마을 주민들의 집이 옹기종기 처마를 맞대고 있어 정겹다. 소설이 시작되고 소설이 끝나는 공간인 별당에서는 서희가 치맛자락을 끌며 나타날 것 같기만 하다.
무딤이들로도 불리는 악양들판은 최참판댁 솟을대문을 통해서도 한눈에 들어온다. 무딤이들은 밀물 때 섬진강물이 역류하고 홍수가 나면 무시로 물이 드나들었다고 해서 붙여진 우리말 이름. 악양들판은 여의도보다 조금 작은 83만평으로 예전엔 드넓은 모래톱과 척박한 논밭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때 둑을 쌓으면서 만석지기 부자 서넛은 나올 만한 문전옥답으로 바뀌었다.
박경리 선생이 평사리 땅을 밟기 400여년 전 백의종군 길에 나선 이순신 장군이 하룻밤을 보냈던 마을. 한국전쟁 때는 빨치산이 추수철을 전후해 남부군과 함께 일주일 동안 악양을 해방구로 장악했던 곳이기도 하다. 가상과 현실의 공간이 뒤섞인 악양슬로시티는 그래서 더욱 극적이다.
◇여행메모
남해고속도로 하동IC에서 19번 국도를 타고 구례방향으로 올라가거나 순천∼완주 고속도로 구례·화엄사IC에서 19번 국도로 갈아타고 승용차로 20분쯤 내려오면 악양슬로시티가 나온다. 최참판댁이 위치한 상평마을에는 ‘용이네’를 비롯해 소설 속의 공간이 재현돼 있다. 한산사 입구에 설치된 ‘사진 찍기 좋은 녹색명소’는 지리산 자락에 둘러싸인 악양들판과 섬진강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
하동=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

친환경 농업을 실천하고 유기농 밥상을 고집하는 마을이 있다. 대대로 살아온 정든 마을과 전답이 장흥댐 건설로 수몰되자 주민 대부분은 고향을 떠나갔다. 하지만 청정고을을 지키기 위해 남은 주민들은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모험을 감행했다. 농약을 피해 깊은 산속으로 들어온 그들의 밥상에는 조미료는 물론이고 생선과 육류마저 사라졌다.
전남 장흥슬로시티는 장흥댐 수몰지역인 유치면 전역과 장평면의 우산마을 및 병동마을 일대. 저마다 특색을 지닌 마을들은 유치면 인근에서 발원해 남해로 흘러드는 탐진강 주변에 보금자리를 틀고 있다. 한국전쟁 때 장흥 일대가 쑥대밭이 될 때도 유치면이 화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산세가 험하고 골짜기가 깊었기 때문.
탐진강에서 피어오른 가을 물안개가 스러지고 산촌의 아침이 밝았지만 인적 드문 마을은 여전히 고즈넉하다. 등고선을 그리며 산을 오르는 손바닥만한 다랑논은 깊어가는 가을을 맞아 황금색으로 물들고 벚나무 가로수는 한 잎 두 잎 단풍이 들기 시작했다. 빨갛게 익은 홍시가 툭툭 떨어져 묵은 돌담을 점묘화처럼 수놓고 탐진강 청류는 산새처럼 재잘거리며 남해바다로 가을여행을 떠난다.
장평면의 우산마을은 착하고 순한 자연 농부로 불리는 지렁이를 이용해 유기농 채소를 재배하는 마을. 마을 연못에서 뗏목타고 낚시하기, 당나귀 타기, 토종닭 먹이주기, 유기농 야채 수확 등 자연과 함께하는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가지산 자락의 봉덕마을은 ‘어머니표’ 슬로푸드인 청국장으로 유명하다. 청국장과 함께 주민들이 직접 재배한 표고버섯과 산나물, 보림사 야생녹차로 덖은 보정차는 이 마을을 대표하는 농산물.
유치면의 반월마을은 장수풍뎅이로 널리 알려진 산골마을이다. 버려진 표고버섯 자목을 활용해 장수풍뎅이를 사육하는 이곳에는 도시 어린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신월마을은 ‘장흥삼합’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표고버섯의 산지. 숲 속마다 A자로 잇대어 놓은 참나무 자목에서는 향긋한 향기의 표고버섯이 수확 철을 앞두고 우후죽순처럼 돋아나고 있다.
유치면의 슬로시티 중 운월리의 신덕마을은 하늘과 가장 가까운 동네. 봉덕마을에서 황금색으로 채색한 골짜기 다랑논을 따라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갑자기 하늘이 열리면서 신덕마을이 나온다. 신덕마을은 유기농법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전인 1994년부터 3무농법(무화학농약, 무화학비료, 무화학제초제)으로 농사를 지었던 마을.
주민들은 유기농법에 머무르지 않고 밥상도 철저하게 유기농 채식 식단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콩으로 소시지를 만들고, 우리밀로 빵과 고기를 만들었다. 송홧가루로 과자를 만들고, 표고버섯이나 가지로 탕수육도 만들었다. 반찬으로 나오는 표고버섯 죽순 두부 등 모든 음식이 유기농법으로 재배된 청정재료들로 만든 것이다.
입소문이 나자 슬로푸드를 꿈꾸던 사람들이 하나 둘 마을로 이사를 오기 시작했다. 원주민 10여 가구가 살던 신덕마을은 현재 90가구 190여명으로 늘어났다. 2009년에는 전남도의 지원으로 마을에서 1㎞ 떨어진 산 정상에 한옥 24채로 이루어진 행복마을이 조성됐다.
하늘 아래 첫 동네인 행복마을에서 하룻밤 자면서 슬로라이프를 체험하기 위한 조건은 술 담배는 물론 TV시청을 하지 않아야 한다. 좋은 것은 하고 나쁜 것은 하지 않는다는 주민들의 DGNB(Do Good Not Bad)운동에 동참해야 슬로시티 방문객들도 행복마을에서의 행복한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여행메모
광주에서 29번 국도를 타고 가다 화순에서 839번 지방도로 갈아타고 군 경계를 넘으면 장평 우산마을이 나온다. 마을별 체험프로그램 예약은 장흥슬로시티 홈페이지(www.jhslow.com)로 하면 된다. 이밖에도 장흥에는 유치자연휴양림(061-863-6350)과 100ha 규모의 편백나무 숲에 위치한 억불산 편백숲 우드랜드(www.jhwoodland.co.kr) 등 슬로라이프 체험 장소가 몇 곳 있다.
장흥=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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