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해영 (10) 나홀로 기술학교… 그러나 주님은 또 다섯 학생을
‘나도 가야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왜 하필 내가 끝까지 남아있단 말인가. 자, 이제 나도 한국에서 하다가 만 성공, 그 일을 하러 가야겠다. 더 이상 이곳에서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학생도 없는 학교에서 내가 무엇을 한단 말인가.
모두가 떠난 자리다. 학교 책임자도 교사도, 심지어 학생도 모두 떠났다. ‘나도 가야지’ 하는 결론을 내린 뒤 홀로 남은 학교에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나는 선교사가 되겠다거나 하나님께서 아프리카로 부르셨다는 소명 없이 갑작스럽게 합류했기에 일이 이렇게 되자 미련 없이 한국으로 돌아갈 이유가 생긴 셈이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너무 아프고 슬펐다. 한국과 미국에서 보내준 귀중한 헌금으로 설립된 학교는 텅 비었고 기계 위에는 먼지가 쌓여갔다. 이역만리에서 온 선교사들의 헌신도 보람 없이 스러져갔다.
기술학교는 네 번째의 신입생을 받은 뒤 한 학기를 마치고 무기한 휴교에 들어갔다. 보츠와나 그루터기선교부는 1986년 조성수 선교사가 개척하면서 시작됐다. 한국본부에서 파송돼 온 선교사들은 주님의 은혜에 감동해 자원하여 온 평신도가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각자의 재능에 따라 사업부와 선교부로 나눠 일했다. 이는 자비량선교를 지향하는 그루터기선교부의 전략이었다. 하지만 신학도 하지 않는 평신도가 ‘기능인선교사’란 이름으로 현지에서 사업을 하고 유치원, 직업학교 등을 하는 것은 선교활동이 아니라며 배척하는 사람도 있었다.
선교부는 늘 어려움에 직면했다. 처음에는 거주권 확보가 문제였다. 이를 위해 재단법인을 설립했다. 영주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사람이 부족했다. 인원을 확충하고 일이 확장되면서 돈 문제가 대두됐다. 사업이 자리 잡으면서 어느 정도 현지에서 재원조달이 가능해지자 초기의 개척선교사들이 건강악화로 지쳐갔다. 여러 이유로 사역자들은 다른 사역지로 떠나거나 한국으로 돌아갔고 어떤 이는 아예 하늘나라로 떠났다. 기술학교에서 일하던 교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계속되는 어려움에 지친 기술학교의 선임은 1994년 4월에 교사와 재학생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본인도 떠났다. 그리고 나 혼자 남게 됐다. 학교는 완전히 문을 닫았고 언제 열릴 것이라는 기약도 없었다.
선교사들은 이곳에 올 때 유서를 쓰고 올 정도로 심지가 굳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선교지의 어려움은 이들도 두 손 들게 만들었다. 유서는 쓰지 않았지만 나는 항상 10년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내 기술을 배우는 데도 10년이 걸렸는데 이곳에서도 결실을 보려면 그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판단에서였다. 아침에는 짐을 싸고 저녁에는 마음이 아파 기도하며 두어 달을 홀로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돌려보낸 여학생 5명이 학교로 찾아왔다. 그리고는 나더러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해 달라며 4달 뒤 있을 기능시험 준비를 함께 해 달라고 간청했다.
“나밖에 없는데, 어떻게 너희들을 도울 수 있니.”
“선생님이 계시니까 괜찮아요.”
아이들이 내게 선생이 돼 달라고 한다. 먹을 것도 별로 없는 이곳에서 음식은 자기들이 알아서 해결할 테니 기술만 가르쳐 달라는 것이다. 캄캄한 밤하늘, 전기 불빛 하나 없는 사막의 밤은 적막하고 쓸쓸하다. 기숙사에서 촛불 빛이 새어나온다. 선생도 다 떠난 학교에 학생들이 찾아와 공부하는 것이다. 마음이 아팠지만 한편으론 아이들의 노력이 기특했다. 만감이 교차했다. 나는 모래 바닥에 앉아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아무도 없어요. 모두 다 떠나고 혼자 남았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공부하겠다고 와 있어요.”
기도는 침묵이 되고 마침내 눈물이 됐다. 한참을 울고 있는데 마음 밑바닥에서 세미한 음성이 들려왔다. ‘얘야, 가난하고 병으로 고생하며 나를 모르는 이 마을 사람들에게 내가 와 있는데 너는 어디로 가려 하니. 너는 여기서 나와 같이 살자. 네가 그것 이외에 무엇을 더 바라니?’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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