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36) 성 버나드 ① 하나님을 향한 갈망

Է:2012-09-09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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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36) 성 버나드 ① 하나님을 향한 갈망

‘신랑으로서의 하나님’을 갈망하라

라인 강을 거쳐 영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평소에 생각했던 사람 한 명이 떠올랐다. 성 버나드(St. Bernard·1090∼1153)이다. 클레이보(Clairvaux)에 세운 수도원 때문에 ‘클레이보의 버나드’로 더 많이 알려진 그는 필자가 오래전부터 사모해 왔던 사람이다.

어느 날 찬송가 85장 ‘구주를 생각만 해도’를 부르다가 왼쪽 작사자 이름에 ‘클레이보의 버나드’라고 쓰여 있어서 버나드가 누굴까 늘 궁금했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이렇게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가장 좋은 것은 4절이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주 사랑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이렇게 간명하면서도 가슴을 적시는 글을 쓴 사람이라면 분명 훌륭한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로 그는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처럼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었는데 이번 여름, 목회자들과 함께 떠난 유럽영성투어에서 어쩌면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아 기대가 컸다.

아가서, 버나드 영성의 진수

그러나 역시 버나드까지 가는 길은 멀었다. 테제에 도착해서 프랑스 지도를 살펴보니 테제에서 그가 몸담았던 수도원이 있는 시토(디종)까지 100㎞밖에 되지 않았지만 자동차가 없이는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버나드를 두고 오면서 대신 책을 통해 버나드를 만나기로 했다.

버나드는 우리에게 왜 중요한가. 우선 루터에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중요하다. 루터는 로마서 강해에서 자신의 개혁이 세 가지로부터 영향 받았다고 말한다. 첫째 성경, 둘째 어거스틴, 그리고 셋째가 버나드와 타울러.

버나드의 무엇이 루터에게 영향을 주었을까? 아마도 버나드가 수도원에 속해 있었지만 수도원주의자가 아니었으며, 스콜라시대에 살았지만 신학보다는 성경을 붙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사람은 수도원에 남아 있고 한 사람은 수도원에서 나왔지만 두 사람은 모두 성경으로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버나드의 영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아가서’이다. 그는 아가서 1장과 2장을 설교하는 데만 18년이 걸렸으며 평생 아가서를 88편이나 설교했다. 그는 ‘아가서’를 전형적인 알레고리적 방법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신랑과 신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해석했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아 3:1) 버나드는 하나님과 인간간의 최고의 사랑을 신랑과 신부의 유비로 본다. 주인으로서 하나님은 우리의 경외의 대상이요,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우리의 공경의 대상이지만, 신랑으로서 하나님은 우리 사랑의 대상이다.

주인에 대해 종은 죄 때문에 두려워하고, 아버지에 대하여 아들은 유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다. 두려워하는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 아니며, 이익을 얻고자 하는 사랑도 순수한 사랑이 아니다. 오로지 사랑 때문에 사랑해야 진정한 사랑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며,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한다.” “사랑은 사랑 외에 어떤 다른 원인으로도 열매 맺지 않는다. 사랑은 사랑 자체가 목적이다.” 그러니 가장 순수한 사랑은 신랑과 신부의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이 ‘아가서’이다.

사랑은 찾는 것

사랑의 특징은 무엇인가? 찾는 것이다. 사랑은 찾을 때까지 찾는 것이다. 찾아야 사랑이며 찾아져야 사랑이다.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았노라.”(아 3:1) 신부는 ‘사랑하는 자’를 찾지 않고 ‘마음으로 사랑하는 자’를 찾는다. 신부는 ‘밤에’ 찾지 않고 ‘밤마다(All night)’ 찾는다. 사람들은 밤에 육체의 목마름을 찾지만 신부는 밤에 마음(영혼)의 목마름을 찾는다. “내가 일어나서 성 안을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아 3:2) 신부는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미친 사람처럼 성안을 돌아다닌다.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노라.”(아 3:2) 찾아도 만나지 못하는 사랑은 얼마나 비참한 사랑인가.

신랑으로부터 보냄 받은 순찰자

신부는 피곤에 지쳐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바로 그때, 신부 앞에 한 사람이 나타난다. “성 안을 순찰하는 자들을 만나서”(아 3:3)라 할 때의 그 순찰자이다. 어두운 밤거리를 지키며 이리저리 다니는 순찰자란 신부에게 누구인가?

버나드는 그 순찰자가, 성경에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눅 12:37)라고 언급할 때 가리키는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한다. 어두운 밤, 하나님이 보내서 영혼을 지키는 영혼의 지킴이들이다. 이들이 곧 사도요, 사도 같은 사람들이다. 교회가 공격을 받아 위험할 때 교회를 지키는 사람들, 어두운 밤에 길을 잃은 영혼들을 돌보는 목자들이 그들이다. 중세를 살았던 버나드는 그것이 바로 교회요, 교회적 사명이라고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사도든, 교회든, 목양자든, 시대적 사명자든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위해 순찰자를 예비하신다.

그런데 신부가 순찰자를 만난 장면을 자세히 보아야 한다. 언뜻 보면 신부가 순찰자를 찾았고 순찰자가 신부를 발견했지만 자세히 보면 신부가 찾아졌고 발견되었다. 순찰자는 스스로 성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신랑)의 명에 따라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순찰자는 보냄 받은 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버나드는 이렇게 말했다.

“순찰자가 그녀를 찾아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하며, 그분이 그녀를 찾아내도록 예비하셨다.”

성경을 보자. 가이사랴에서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전도할 때 베드로가 고넬료를 찾았는가?(행 10:1) 다메섹에서 아나니아가 바울을 위해 기도할 때 아나니아가 바울을 발견했는가?(행 9:10).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예비하셨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발견했지만(요 1:45∼48), 주님은 이미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그를 보셨다. 안드레가 시몬을 찾아갔지만, 주님은 이미 시몬에게서 게바를 보셨다(벧전 5:9). 순찰자를 만난 신부는 곧 신랑을 만났다.

붙들려서 붙잡는 은혜

아가서 3장 4절이 중요하다. ‘그들을 지나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났다.’ 왜 ‘지나치자마자’일까? 순찰자의 역할이 거의 필요 없었다는 뜻이다. 신부가 순찰자를 만나 도움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순찰자 때문에 신랑을 만난 것이 아니라 신랑 때문에 신랑을 만났다. 그래서 ‘지나치자마자’이다.

우리도 신부처럼 밤마다 하나님을 갈망해야 한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큰 선이요 영혼이 알고 있는 가장 큰 복이다. 그것은 영혼이 받은 으뜸가는 선물이며 영혼의 발달의 마지막 단계이다.”

누구든지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마 7:8)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고 가까이 계실 때 그를 불러야’(사 55:6) 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신부가 신랑을 찾은 것이 아니라 신부가 찾아졌고, 신부가 신랑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신부가 발견되었다.”

이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우리의 영적 갈망은 우리의 인간적 노력이 되고 우리의 기도는 종교적 염원이 된다.

그런 점에서 신부의 마지막 장면이 중요하다. “그를 붙잡고 내 어머니 집으로, 나를 잉태한 이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아 3:4)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모습은 언제나 우리가 그를 붙잡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붙잡지 않았다면 우리가 그를 붙잡을 수 있을까? 붙들리지 않으면서 붙잡는 수가 있을까? 중세를 살았던 버나드는 이렇게 우리를 은혜 안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한다.

이윤재 목사(한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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