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가를 찾아서] (36·끝)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Է:2012-08-30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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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마가를 찾아서] (36·끝)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마가 순교할때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음성

필자가 추적한 대로라면 마가는 AD 50년 바벨론에 가서 베드로를 만났고, 그의 구술을 받아서 최초의 복음서 ‘마가복음’을 기록했다. 그리고 AD 62년 당시 로마에 연금돼 있던 바울을 만나 그의 부탁을 받고 골로새 교회로 갔다(골 4:10). 마술사 시몬이 로마의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던 당시 상황으로 보아 바울은 그에게 베드로를 찾아 로마로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마가는 AD 63년 베드로가 로마에 도착했을 때 그와 동행했을 것이다. AD 65년 베드로가 체포되자 마가는 그의 지시를 따라 알렉산드리아로 간다.

“마가는 애굽으로 가서 자신이 적어 놓은 복음을 가르친 첫 번째 사람이며 알렉산드리아에 교회를 설립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유세비우스 ‘교회사’ 2∼16)

그리고 마가는 그곳에서 순교한 것으로 되어 있다.

“마가는 알렉산드리아로 건너가 교회를 창립하고 그곳에서 순교했다.”(야코부스 데 보라기네 ‘황금전설’ 2∼57)

그러나 그가 언제 순교했는지에 대해서는 혼선이 있다.

“네로가 통치한 지 8년째 되는 해에 안니아노스는 복음사가 마가 이후 알렉산드리아 지역을 책임 맡은 첫 번째 사람이었다.”(유세비우스 ‘교회사’ 2∼24)

이 기사를 근거로 네로의 즉위 후 8년 즉, AD 62년에 마가가 죽었다고 추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마가는 AD 62년 골로새 교회로 갔고, 바울이 ‘디모데 후서’를 쓴 AD 66년에도 분명히 생존해 있었기 때문이다.

“마가를 데리고 오라”(딤후 4:11)

그러므로 마가의 순교 시기를 추정하려면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정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상권을 놓고 늘 충돌해 온 유대인과 헬라인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세 번의 큰 폭동을 일으켰다. 그 첫 번째가 카이우스 황제의 말기 AD 40년이고, 다음은 AD 66년 본국 쪽의 소요에 동조해 폭동을 일으켰다가 5만명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큰 사건은 AD 70년 예루살렘 함락 후에 일어났다.

“유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전세가 불리하자 알렉산드리아로 탈출한 시카리 단원들이 있었다.”(요세푸스 ‘유대전쟁사’ 7∼10)

열심당과 함께 로마군에 대항하여 싸웠던 암살 전문 테러 단체 ‘시카리’의 도망자들은 알렉산드리아로 건너와 그곳의 유대인을 선동했다.

“로마인들이 우리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우리는 로마와 싸워 자유를 되찾아야 할 것이다.”(‘유대고대사’ 7∼10)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알렉산드리아 총독의 보고를 받고 유대인의 회당을 파괴하여 폭동의 원천을 봉쇄하라고 지시했다. 시카리 지도자 요나단의 선동으로 폭동이 재발하자 로마군은 유대인 지도층 3000여명을 학살했다. 요나단이 체포되고 폭동은 진압됐으나 유대인에 대한 분노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당시 안니아노스에게 교회를 맡기고 펜타폴리스에서 복음을 전하던 마가가 돌아오자 알렉산드리아의 거상이었던 그에게 유대인의 분노가 쏠렸을 가능성이 있다.

“마가가 부활절 예배를 인도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의 목에 밧줄을 걸었다. 마가를 거리로 끌고 다니던 사람들이 그를 북쿠리로 데려가자고 소리쳤다.”(야코부스 데 보라기네 ‘황금전설’ 2∼57)

‘북쿠리’는 도살장이라는 뜻이었다. 마가는 도살장이 있던 자리에 교회를 건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피투성이로 해안의 북쿠리에 끌려간 그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폭도들이 그를 땅바닥에 엎어 놓고 사지에 못을 박았다. 그의 마지막 말은 그분이 십자가에서 했던 말씀과 같은 것이었다.

“저의 영혼을 당신의 손에 맡깁니다.”(‘황금전설’ 2∼57)

AD 70년경 마가가 순교한 이후 사도들의 순교 소식이 잇달았다. 맛디아는 에티오피아에서 도끼에 찍혀 숨을 거두었고, 나다나엘은 아르메니아에서 전신의 가죽이 벗겨진 채 순교했다. 셀롯인 시몬은 페르시아에서 톱에 썰려 죽었으며, 다대오 역시 페르시아에서 숨졌다. 스쿠디아에서 돌아온 안드레는 아가야 지방의 파트라스에서 X형 십자가에 달렸고, 마태는 에티오피아에서 자객의 칼에 찔려 순교했다. 도마는 AD 72년 인도 마드라스에서 네 개의 창에 찔려 죽었고, 빌립은 AD 78년 히에라폴리스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렸다.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구별하기 위해 ‘작은 야고보’로 불렸던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행적이 알려지지 않았다.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마 11:11)

AD 79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죽자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티투스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이듬해에 베스비우스 화산의 폭발로 폼페이 시가 파묻히는 참극을 목격했고, 2년 후 40세로 단명했다. AD 81년 황제가 된 도미티아누스는 정치적, 군사적 공적이 없는 자신의 권위를 폭정으로 세우려 했다. 그는 특히 그리스도인에 모진 박해를 가하여 네로 이후 교회의 가장 큰 적이 되었다.

“티투스 치세 2년에 로마 교회의 책임자 리누스는 아넨클레투스에게 직임을 인계했고, 도미티아누스 치세 12년에 아넨클레투스는 클레멘트에게 그 직분을 넘겨주었다.”(유세비우스 ‘교회사’ 3∼13, 15)

그 환난의 시대에 사도 요한은 에베소 교회의 지도자로 있었다. 그는 세 개의 목회 서신을 쓰면서도 베드로가 기대했던 복음서의 완성을 미루고 있었다. 바울이 순교한 후 누가는 헬라의 중남부 보이오티아에서 소천했는데 어찌 된 셈인지 그의 묘는 지금 에베소에 남아 있다. 누가가 제자들에게 자신의 시신을 에베소로 옮겨 묻어달라고 유언했음에 틀림없다. 혹시 누가는 시신이나마 요한이 다니는 길목에 지켜 서서 복음서의 완성을 촉구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AD 95년 요한은 체포되어 밧모 섬에 유배당한다.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장차 될 일의 환상을 보고, 그분의 지시로 ‘요한계시록’을 쓰게 된다. 이듬해 도미티아누스가 죽어 에베소로 돌아온 그는 마침내 ‘요한에 의한 복음서’를 쓰게 되는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요한은 비로소 예수 그분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곧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 실리적 성품의 마가는 베드로의 기억을 되살려 내었고, 레위 출신의 마태는 말씀의 성취를 증거했으며, 의사인 누가는 치유의 능력에 중점을 두었고, 현실의 욕망을 따르던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했다. 후일의 교회는 마가를 사자에, 마태를 말씀의 전달자인 천사에, 누가를 일하는 소에, 그리고 요한을 공중의 독수리에 비유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을 죄인으로 자처하여 그의 복음서에 자기 이름을 쓰지 않았다. 오직 출세와 야망 때문에 세례 요한을 만나러 갔다가 그분을 만난 일, 나사로를 시기하여 그분을 슬프게 해드린 일, 그분이 잡혀갈 때 혹시 최후의 반전이 있을까 하여 혼자 골고다에 갔던 일, 거기서 그분의 어머니를 떠맡게 된 사연까지 모두 진솔하게 다 털어 놓으며 그는 복음서를 완성했다.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요 21:24)

요한은 마가, 마태, 누가의 복음서뿐 아니라 사도들의 서신이나 그 사본들까지도 대부분 손에 넣고 있었다. AD 367년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지도자 아타나시우스는 네 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사도들의 서신 21편과 요한계시록을 합해 27권을 신약성경의 정경으로 채택했고, AD 397년 카르타고 공회가 이를 확정했다. 하나님의 아들이 전한 그분의 나라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 개역한글판)

그로부터 다시 70년이 지난 AD 467년 베네치아의 상인들이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방문하여 거액의 헌금을 약속하고 마가의 무덤을 열었다.

“마가의 유체를 무덤에서 꺼낼 때 그윽한 향기가 알렉산드리아의 모든 거리에 가득했다.”(야코부스 데 보라기네 ‘황금전설’ 2∼57)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동의를 얻어 마가의 유체는 베네치아로 옮겨져 안장되었고 베네치아 사람들은 그 자리에 장려한 기념 교회를 건축했다. 베네치아의 모든 거리에서는 지금도 마가의 상징인 사자를 볼 수 있다. 로마 교회는 성 마가의 축일을 4월 25일로 정했는데 이는 본래 곡물신에게 풍작을 기원하는 농사제 날이었다. 그는 또 유리 세공업자, 금속 공예업자, 가죽 제품 업자와 건축 노동자들의 수호 성자가 되었고, 또 각종 병을 예방하는 성인으로도 추앙을 받고 있다.

김성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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