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메덴블릭 박사가 전한 미국식 ‘다른 복음’

Է:2012-08-24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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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T 메덴블릭 박사는 미국의 그랜드 래피즈에 소재한 칼빈신학교(Calvin Theological Seminary) 총장이다. 며칠 전 한영신학대학교 영성수련회에 강사로 초청된 그의 특강을 접할 기회가 있었다. 메덴블릭 박사는 본래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이후 뉴라이프 교회(New Life Church)를 개척해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으며, 1년 전에 미국 개혁주의 신학의 산실인 칼빈신학교의 총장으로 초빙된 분이다. 신학자라기보다는 목회자요 설교가인 그의 강의는 듣기에 쉽고 평이했지만, 성경적인 통찰과 목회 연륜에서 배어난 직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주고 받기’ 방식의 신앙

메덴블릭 박사가 말한 것 중 미국 교회에 대한 자화상이 일면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소개해봄직 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하나님과 마치 계약서를 쓰는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미국 신자들이 있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헌신하면 헌신한 만큼 하나님께서 빚진 것이므로 하나님이 갚아 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주고받기(give and take)’ 방식의 신앙은 자신들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빚쟁이로 만들어 버린다. 메덴블릭 박사는 이를 두고 미국판 ‘다른 복음’(갈 1.7)이라고 한다. 이런 오해는 인간사회의 계약서 관념을 그릇되게 하나님에게 적용해 생기는 것이다. 계약서란 나와 너라는 두 주체가 주거니 받거니 하는 방식으로 약속을 맺는 것으로,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명제를 가능케 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이런 ‘계약서 신앙’이 출발부터 잘못임을 증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내게 생명을 주셨다면, 생명을 빚진 나는 무엇으로 돌려드릴 것인가. 솔직히 말해보자. 내가 하나님을 위해 사는가, 나와 가족을 위해 사는가. 고백컨대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생명을 주셨다고 믿고 있지만, 나와 가족을 위한 삶의 자리가 그 어떤 것보다 더 크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선뜻 말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는 기도를 들을 때마다 어쩌자고 저런 말을 쉽게 할까라는 두려움이 앞선다. 목사이자 신학 교수인 내가 이런 고백을 한다고 비난하지는 마시라. 그저 한 인간의 독백이려니 하고 참아 주었으면 좋겠다.

인간의 본능적 이기성

그래도 나를 힐난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자신 있게 되묻겠다. “당신이 밥 먹는 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냐,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밥을 먹는다고 대답한다면 위선자이거나 위대한 성자이거나 둘 중 하나다. 내가 밥을 먹거나 안 먹거나 하는 것이 끝이 없는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영광에 눈곱만큼이라도 영향을 줄 수 있겠는가. 이쯤해서도 수긍하지 않는다면 나는 더 원초적인 질문으로 인간이란 유(類)의 본능적 이기성을 낱낱이 도려낼 수도 있다.

내가 열심히 한 만큼 하나님께서 돌려주셔야 한다는 미국판 ‘다른 복음’은 실상은 전혀 복음이 아니다. ‘다른 복음이란 것은 없다’(갈 1.7)고 했다. 할례를 강요하는 소(小)아시아판 ‘다른 복음’에 분개한 사도바울은 단호한 어조로 선언했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9.9)

그런데 미국판 ‘다른 복음’은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닌 것이, 그게 내 모습이고 내 이웃의 모습이고 더 나아가 우리 교회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사다리를 한 계단 올라가면 하나님께 한 계단 가까워졌다고 믿는 것이 우리의 자화상이 아니던가. 그러나 피조물과 창조주의 간격이란 끝이 없는 것이어서, 우리의 노력이란 우주에 떠도는 미세먼지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개미의 본성도 모르는 우리가 감히 하나님의 뜻을 꿰뚫어 아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런 저런 축복을 하셔야만 한다고 주제넘게 지껄이지 말자.

어떤 자들이 압바 마카리오스에게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요”라고 물었다. 원로는 대답했다. “긴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네. 손을 들고 ‘주님, 당신께서 원하시고 아시는 대로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라고 말하게. 만약 영적 싸움이 계속된다면 ‘주님, 저를 도와주시옵소서’라고 말하게. 주님께서 우리에게 적합한 것을 알고 계시므로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이네.”

내 뜻을 접어야 진정한 나

마카리오스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거나 ‘주님, 저를 도와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그런데, 마카리오스의 기도문도 길었던 것일까. 내가 어릴 적 내 어머니는 단지 ‘주님!’, ‘주님!’하며 외마디 외침으로 기도하곤 했던 것을 나는 또렷이 기억한다. 1600년 전의 이집트 사막이든 1600년 후의 한국사회든, 자기의 모습을 깨달은 자들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족하고도 넘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 손으로 잡을 수 있다면야 구태여 기도까지 갈 필요가 없지 않은가. 우리가 갈망하는 그분 앞에서는 나의 땀과 노력도 다 부질없는 것이 된다(엡 2.8-9). 내가 내 뜻을 접을 때에라야 나는 진정한 나로 돌아간다. 내 뜻이 살아 꿈틀거려 하나님을 빚진 자로 만든다면 나는 스스로 내 욕망의 덫에 결박당한 노예일 뿐이다. 그것은 ‘다른 복음’이다.

남상현 한영신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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