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이미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Է:2012-08-1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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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욥기를 특별히 마음에 두는 이유는, 욥기가 ‘선하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에 어찌하여 악이 존재하는가’라는 신정론(神正論)의 물음을 던지기 때문도 아니고, 고난받는 의인 욥이 처음보다 더 큰 축복을 받았다는 해피엔딩 때문도 아니다. 내가 욥기를 좋아하는 것은, 할 말뿐 아니라 못할 말까지 다 하는 욥의 오기와, 말을 쏟아놓으며 대드는 욥을 모두 다 참고 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 때문이다.

욥기는 총 42장으로 된 긴 책인데 그 대부분은 욥이 잘못했다는 친구들의 주장과, 고난이 부당하다는 욥의 항변으로 되어 있다. 잘못의 대가로 벌을 받는다고 말하는 친구들을 향해 욥은 이렇게 토로한다. “친구라는 것들은 물이 흐르다가도 마르고 말랐다가도 흐르는 개울처럼 미덥지 못하고, 배신감만 느끼게 하는구나.”(욥 6:15) 또 욥은 친구들을 이렇게 매도한다. “너희는 무식을 거짓말로 때우는 사람들이다. 너희는 모두가 돌팔이 의사나 다름없다.”(욥 13:4) 여기에 그치지 않고 욥은 하나님을 향해서도 섭섭한 마음을 서슴지 않고 표현한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니, 주님께서는 늘 나를 해치실 생각을 몰래 품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죄를 짓나 안 짓나 지켜보고 계셨으며, 내가 죄를 짓기라도 하면 용서하지 않으실 작정을 하고 계셨습니다.”(욥 10:13∼14) 그런데 하나님은 마음껏 말을 내뱉는 욥을 끝까지 들어주신 후에 욥기 38장에 가서야 처음으로 말문을 여신다.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한 인간의 배신감과 섭섭함, 분함과 억울함 등 모든 항변을 끝까지 묵묵히 들어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나는 성경 외 다른 어떤 책에서도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희열을 느낀다. 욥의 말을 침묵 속에서 모두 다 들은 다음에야, 하나님은 욥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전능한 하나님과 다투는 욥아, 네가 나를 꾸짖을 셈이냐? 네가 나를 비난하니, 어디, 나에게 대답해 보아라.”(욥 40:2) 이렇게 다그치는 하나님 앞에서 욥이 하는 대답은 신구약을 통틀어서 가장 코믹하고 신선하다. “…이미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더 할 말이 없습니다.”(욥 40:4∼5)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말을 많이 했다는 욥의 대답이 웃기면서도 속이 후련하다.

요즘 우리는 가상공간과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마치 욥처럼, 마음껏 말을 하며 살고 있다. 이런 말의 자유를 남용하여 인신공격을 하는 것은 분명 그릇된 것이다. 하지만 ‘미네르바’ 사건에서 보듯, 정당하게 표현된 견해조차 족쇄에 채워지는 억압을 보면서, 마음껏 말하도록 내버려두시는 욥기의 하나님을 다시 떠올려본다. 바른 말조차 하지 못하게 막고, 양심의 소리를 말한 사람들을 잔인하게 짓밟았던 탄압의 역사를, 우리는 일제 식민지배와 군부 독재의 시대에서 보지 않았던가. 욥이 느꼈던 바를 마음껏 토로하도록 하나님도 내버려 두시는데, 권력을 사용하여 양심의 소리와 영혼의 고백을 발설하지 못하도록 입을 틀어막는 것은 누가 부여한 권한인가? 우리 역사뿐 아니라 동서양의 역사에서도, 흑암의 시대란 것은, 하나같이,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도록 칼과 창을 들이대며 쇠사슬로 혀를 옥죄인 시대인 것이다.

그런데 사막의 기독교인들은 욥에게서 보는 언어적 정화(카타르시스)보다 더 근본적인 방법을 알고 있었으니, 이름 하여 상상(想像)의 카타르시스(정화)이다. 상상의 카타르시스란 지나간 일과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일의 모습(像)을 떠올리고, 그렇게 무수하게 떠오르는 기억과 현재의 집착을 흘려 떠나보냄으로써 마음속의 상처와 욕념(欲念)을 비워버리는 방법이다. 사막의 성자 안토니우스가 홀로 기도할 때에, 기억 속에 저장된 욕념이 얼마나 강하던지, 육욕은 실제 벌거벗은 여자의 몸으로 나타나 유혹했고, 본능적 공격성과 욕심은 실제 야생 짐승의 떼로 나타나 안토니우스를 물어뜯기도 했다. 안토니우스가 기도할 때 경험한 많은 환영(幻影)들은 안토니우스에게만 고유했던 것이 아니며, 힘을 다해 기도하던 사막 기독교인들이라면 누구나 비워버려야 했던 사념(邪念) 덩어리였다. 마음속에 마치 희미한 사진처럼 찍혀 있는 과거의 상처와 욕심은 얽히고설키어, 새로운 형태(像)의 탐욕과 공격성을 끊임없이 지금 만들어낸다. 사막의 구도자들은 마음속에 층층이 남아 있는 이런 악덕의 모습을 기도 속에서 훌훌 털어버림으로 마음을 정화하고자 했다. 이렇게 이미지로 떠오르는 사욕(邪慾)을 흘려보낸 다음에라야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마 5:8).

욥과 사막 구도자들의 비슷한 점은 무엇일까? 욥은 발설함으로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버리고 치유 받았다. 사막의 기독교인들은 상처받은 과거를 떠올려 비워버림으로 치료받았다. 욥이 마음속에 담고 있던 말을 쏟아내면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았다면, 사막의 구도자들은 이미지화된 언어인 사욕(邪慾)의 기억을 기도 속에서 흘려보냄으로 깨끗한 마음에 도달하여 하나님을 뵙는 축복으로 들어갔다. 응어리를 풀어버려야 한다. 욕심뿐 아니라 상처까지도 비워버려야 한다. 풀어버리고 비워버려 속 시원해진 마음이라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몸소 뵈올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치유받고 어떻게 하나님을 뵈올 것인가?

남성현(한영신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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