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31) 에크하르트 ① 존재를 넘어선 하나님

Է:2012-08-05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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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31) 에크하르트 ① 존재를 넘어선 하나님

라인강의 깊은 묵상… 초월해 계신 신비한 하나님 만나다

강은 영성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영성이란 마치 강처럼 자유롭고 부드럽게 흘러 마침내 죽어가는 것들을 살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루터, 그리고 경건주의의 도시들을 지나 만하임을 벗어났을 때 눈앞에 라인강이 펼쳐졌다. 강 좌우편에는 포도원이 이어지고 절벽에는 고색창연한 고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라인강의 영성

라인강은 생각보다 아름다웠다. 그러나 필자에게 더 그리운 것은 이 지역에서 태어나 영성의 역사에 영향을 준, 소위 ‘라인강 신비주의’라고 불렸던 사람들이다. 수 세기(특히 14∼15세기) 동안 그들은 이곳에서 태어나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역사적으로는 종교개혁을 비롯한 인류의 역사에 영향을 끼쳤다. 주로 도미니칸 수도회에 소속한 그들의 주요 거점은 스트라스부르와 쾰른이었다.

그들 중 대표적인 사람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요한 타울러, 하인리히 수소, 요한 로이스브루크, 토마스 아 캠피스 등이다. 이들의 생각이 언제나 동일하게 표현된 것은 아니었지만, 영혼이 하나님과 합일함으로써 마음과 생활의 순결을 얻으려는 지난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이들은 하나였다. 훗날 종교개혁도 이들의 토양에서 나왔고 특히 루터는 타울러를 통해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타울러의 영적 스승이 에크하르트(1260∼1329)였다.

멀리 그리고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에크하르트의 영성을 한마디로 말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는 하나님을 광범위하게 묵상했고 또한 독특한 방법으로 그것을 표현했다. 그가 살았던 지리적 환경과 관련하여 말한다면, 그의 스케일은 마치 알프스 같고 그의 깊이는 라인강과 같았다. 그가 평생에 걸쳐 관심을 가졌던 주제들에 대해 매튜 폭스의 분석대로 분류하자면 창조세계에 대한 관심,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기부정의 삶, 신비한 하나님 묵상, 그리고 세상에 대한 자비로운 관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모든 것의 근저에는 신비한 하나님이 있다.

에크하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은 한 가지 방식으로 경험되지 않는다. 내가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나에게서 더 멀어진다.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시며 또한 우리보다 가까이 계신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잘 안다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내가 쉽게 알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나는 그를 하나님으로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를 넘어서 계시며, 자기 자신 스스로는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지만 모든 것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어떤 존재다.”

하나님은 스스로 우리 경험세계에 붙잡힐 만큼 겸손하신 분이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경험이 곧 하나님인 것은 아니다. 자연은 창조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와 만나는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본가(本家), 하나님의 성전이다. 실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메아리이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으로부터 밖으로 나왔지만 또한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다. 그렇다고 피조물이 곧 하나님인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피조물 가운데에서 경험되고, 우리는 피조물을 통해 하나님을 안다. 그러나 피조물이 곧 하나님은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있지만, 여전히 피조물 너머에 계신다.”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 속에 계신다’는 에크하르트의 믿음을 범신론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범신론은 ‘모든 것이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모든 것’이라는 주장이다. 범신론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부인한다.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불가언성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믿는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는 영성의 역사에 있어서 토마스 아퀴나스보다는 어거스틴의 맥을 잇고 있다.

거울은 거울이고 태양은 태양이다

그에 의하면 창조는 여전히 하나님 안에 머문다. 대야 속에 거울을 집어넣고, 그 대야를 태양 아래 둔다고 하자. 거울 속에 태양이 비치지만 태양이 비친 거울 자체가 태양은 아니다. 거울은 여전히 거울일 뿐, 태양은 거기에 없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 안에 있지만 모든 존재가 곧 하나님은 아니다. 영혼에 하나님이 비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영혼은 영혼일 뿐이다. 하나님은 초월의 세계에 계시므로 우리가 이성을 통해 피조물 안에 있는 하나님을 발견했다고 해도 내가 발견한 하나님이 곧 모든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와 인식 너머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최상의 상태는 침묵이다.

이러한 생각은 어거스틴의 말과 닿아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은 내적 풍요의 지혜로 침묵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침묵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말할 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는 죄를 범하기 때문이다.

에크하르트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대는 또한 하나님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인식을 초월하여 계시기 때문이다. 그대가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안다 해도 하나님은 그대가 아는 하나님이 아니며 그대는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인가 알았다’고 하는 무지와 어리석음에 빠져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불가지론 같이 여겨지는 에크하르트의 하나님 론은, 하나님을 인간화 또는 수단화하려는 일체의 인간적 시도에 대한 강력한 저항으로 들린다.

하나님을 자유케 하라

오늘날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그런 하나님이 아닌가. 주인이 아니라 종이 된 하나님,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된 하나님, 존재의 근거가 아니라 존재의 방법이 된 하나님을 우리는 믿지 않는가. 우리는 소위 도구적 하나님을 떠나 본질적 하나님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믿음의 회복을 위해 에크하르트는 우리의 머리와 손에 붙잡혀 있는 하나님, 우리의 주머니·성공·행복·소유 속에 예속된 하나님을 본래의 위치에 돌려놓으라고 말한다. 에크하르트의 이런 생각이 루터의 종교개혁에 영향을 주었다면 과연 어떤 것일까. 중세의 성례전적 속박에 예속되어 교회화된 하나님을 제자리에 되돌려 놓는 ‘하나님의 자유’가 아니었을까.

1329년 에크하르트는 당시 교황 요한22세로부터 이단으로 단죄 받는다. 에크하르트에 대해 총 27개 항목으로 된 교황의 문서에서 16개는 ‘이단적’으로, 11개는 ‘위험한 것’으로 단죄하고 있다. 교황이 단죄한 사람이 어찌 에크하르트뿐이었겠는가. 아마도 (거의 확실히) 교황의 심기를 건드린 것은 중세적 구조 속에 갇혀있었던 ‘하나님의 자유(해방)’가 아니었을까.

중세의 하나님이란 오직 성직자의 중개(mediation)를 통해서만 그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였으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구조적 방법이 성례전이었다(7성사). 그러나 에크하르트는 성례전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그가 교회의 존재를 충분히 인정하고 그 안에 평생 소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하나님과의 즉각성(immediacy)을 강조했으며, 그러한 주장이 성례전과 사제의 중보를 무기로 교회화한 중세 교회와 교권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아니었던가. 에크하르트가 말하고 믿었던 하나님은 우리 시대에도 도전이 되고 경고가 되어야 한다. 우리 자신의 생각과 욕심으로 우리 안에 가두어 놓은 하나님, 그 하나님을 본래의 하나님 되게 하는 것. 인간의 자유보다는 하나님의 자유를 더 회복시키는 것. 그것이 에크하르트와 우리 시대의 공통된 과제가 아닐까.

-하나님을 수단화하려는 시도 경계-

“존재의 근거가 아니라 존재의 방법이 된 하나님… 우리는 소위 도구적 하나님을 떠나 본질적 하나님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 욕심 안에 붙잡혀 성공·행복·소유 속에 예속된 하나님을 본래 위치에 돌려 놓아야 한다”

“성직자의 중개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

<한신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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