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기도가 욕망을 벗어날 때
돌이켜 보면 학창시절 내가 기도하던 모양새는 좀 별난 데가 있었다.
누구의 가르침이었는지 정확히 떠올릴 수 없으나 기도는 가급적 자세하게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좋게 생각한 것 같다. 그리하여 세세히 기도하는 것을 실천했다. 아예 기도 노트를 만들어놓고 기도 제목을 써가며 기도를 즐겨하기도 했다.
41가지의 기도 제목
그때만 해도 하나님께 바치는 기도는 대체로 ‘이런 저런 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마 7:7)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기도 노트에 적어놓은 기도의 제목은 무려 41가지. 기도제목이 무엇인지는 세월에 묻혀버려 기억할 수 없지만 제목이 그렇게 많았다는 것만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쩌면 몇 가지 소원은 응답됐을 것이고 그 때문에 어렵고 힘든 젊은 시절에 더 굳은 믿음을 갖게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기도에는 커다란 방향 착오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곧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따르는 것은 내팽개치고 내가 정한 뜻에 하나님이 맞추어주시기를 바랐던 것이다.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을 구한 것이 아니라 내가 상상한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계속 졸라댔으니 지금 생각해 보니 적반하장 격이다.
어느 날 한 형제가 안토니오스에게 와서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청했다. 우리 같으면 기도해 달라는 말에 ‘무슨 근심이 있습니까’라고 묻고는 기도해 줄 것이다. 그러나 사막의 구도(求道)를 개척해 나간 기도하는 사람 안토니오스에게는 평범한 대답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간청에 안토니오스는 단호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그대가 그대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고 하나님께 그대의 청을 아뢰지 않는다면, 나도 그대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하나님도 그대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실 걸세.” 무언가 허를 찌르는 대답 같은데 그 뜻이 얼른 이해가 되지 않고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내가 신학교에서 배웠던 실천신학이나 조직신학으로도 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대답이다.
하지만 안토니오스가 누구인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불타오르는 사막 한가운데에서 홀로 헤아릴 수 없는 깊은 두려움과 고독에 빠지기도 하고 불꽃처럼 타올랐다 사라지는 무수한 상념과 처절한 씨름을 한 바로 그 사람이 아니던가. 따라서 그의 말을 가볍게 여기지 말자.
구체적으로 기도하라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안토니오스의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안토니오스를 찾아온 형제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큰 근심이 있었다. 그것 때문에 괴로운 나머지 자신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기도해 달라고 안토니오스에게 요청한다. 그러나 형제의 이런 태도에 대해 안토니오스는 아주 냉담하게 반응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쩨쩨하게 그런 것 가지고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다. 깜도 안 될 만한 것을 에둘러 문제인 것처럼 생각해 번민하니 얼마나 초라하며 하나님께 기도까지 해야 하다니 얼마나 더 불쌍한가. 그런 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도 불쌍하게 안 볼 것이고 하나님도 더 대견하게 여기실 것이다!
사막의 구도자들은 거의 모든 시간을 기도에 바쳤다. 그런데 그들의 기도는 ‘내게 무엇을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나에게서 무엇을 비워 달라’는 기도였다. 안토니오스에게 온 형제는 아직 기도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초심자였고 그러기에 ‘무엇을 주십사’라는 내용의 기도를 안토니오스에게 청했다가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던 것이다.
누구에게인지는 모르나 젊은 시절 내가 배웠던 바 ‘구체적으로 기도하라’는 명제는 안토니오스의 직관 앞에서 덜 구운 질그릇처럼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다. 안토니오스는 자신의 마음에서 잘못된 것과 나쁜 것을 비워 달라고 수많은 세월을 기도했다. 그리하여 오랜 사막의 수도생활을 통해 여덟 가지 악한 생각(탐식, 음욕, 탐욕, 분노, 슬픔, 태만, 허영, 교만)을 거의 비워내기에 이른다. 나쁜 생각이 비워진 마음의 빈자리는 그 대신 하나님께서 주신 갖가지 은사들로 가득 채워졌다. 안토니오스의 위대한 점은 미래를 예언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마음을 투시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다. 영적으로 그가 위대하다면 그것은 그 깊은 사막의 고독 속에서 홀로 자신의 악한 생각과 싸워 그것을 비워냈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들어오실 자리를
젊은 시절 나는 ‘무엇을 주십사’ 하는 기도를 했지만 지금의 나는 ‘무엇을 비워주십사’ 하는 기도에 더 이끌린다. 아직도 간혹 무엇을 주십사 하는 달콤한 기도가 입 끝에서 맴돌 때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하나님을 못미더워 하면서 꼭 달라고 조르는 내 모습이 송구하기도 하고 또 그런 걸 주십사 하는 내 생각이 얍삽한 것 같기도 해서 그런 식으로 대놓고 기도하지는 못한다.
만약 내 마음이 욕구로 빈틈없이 꽉 차 있어 하나님께서 들어오실 자리가 없다면 나는 얼마나 불쌍한 존재인가. 만약 내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 앞에서 태엽 감은 인형처럼 욕구만 되뇌어 그분의 말씀을 들을 귀가 없다면 나는 얼마나 불행할 것인가. 나의 근원이 되시는 진실한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해 내 사심(私心)으로 그린 나만의 하나님을 내려놓아야 한다. 기도가 욕망을 벗어날 때라야 비로소 하나님은 내게로 들어오시고 나는 내가 되는 것이다(계 3:20).
<한영신학대 교수·캐나다 몬트리올대 초청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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