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정철훈] 올림픽과 시인 이상
1936년 8월 2일 저녁, 시인 이상(1910∼1937)은 일본 도쿄에서 온 친구들과 함께 경성의 한 주점에 앉아 있었다. 밤 11시가 되자 올림픽 중계방송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그날 밤부터 JODK(경성방송국)는 NHK(일본방송국) 아나운서가 독일 현지에서 진행하는 일본어 방송을 받아 제11회 베를린올림픽을 중계하기 시작했다. 당시 잡지 ‘조광’ 9월호에 단편 ‘날개’를 투고해 놓고 잡지가 인쇄되어 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24시간 전인 8월 1일 밤, 이상은 경성역에서 여동생 옥희를 기다리다 바람을 맞고 씁쓸하게 귀가했다. 여동생은 그날 오전 오빠를 찾아와 “오늘 밤 경성역에서 만주로 가는 K를 배웅하기로 했으니 오빠가 함께 전송해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여동생이 K라는 못 미더운 남자와 만주로 떠날 작정임을 알고 이를 극구 말렸던 이상으로서는 K 혼자 만주로 떠나가기로 했다는 말에 제풀에 꺾일 줄도 아는 여동생이 대견했다. 하지만 여동생은 오빠를 보기 좋게 따돌린 채 2일 밤 K와 함께 만주로 사랑의 도피행각을 감행했다. 올림픽 중계방송을 들으면서도 여동생 문제로 마음이 편치 않았던 이상은 이런 글을 써서 발표한다.
“너희들이 국경을 넘던 밤에 나는 주석(酒席)에서 올림픽 보도를 듣고 있었다. 우리들은 이대로 썩어서는 안 된다. 당당히 이들과 열(列)하여 똑똑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정신 차려라!”(‘조광’ 1936년 9월호)
‘동생 옥희 보아라’라는 제목의 이 산문의 부제는 ‘세상 오빠들도 보시오’이다. ‘정신 차려라’라니. 명령조의 이 투박한 말은 식민지 경성의 으슥한 주점에서 올림픽 중계방송을 듣고 있던 이상이 베를린에 모인 세계 시민으로 섞여들고 싶은 욕망을 우회적으로 표출한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이상이 섞이고 싶은 세계 시민은 도쿄에도 베를린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제11회 베를린올림픽은 세계 시민들의 카니발이 아니라 스포츠 민족주의 내지 스포츠 국가주의의 또 다른 발현에 다름 아니었다. 히틀러가 개막 선언을 한 베를린올림픽은 국가주의와 남성중심주의, 그리고 인종주의를 확대 재생산하는 가장 농도 짙은 근대의 퍼포먼스였다. 이상은 속았다. 동생 옥희에게 한 번 속고 올림픽에 두 번 속았던 것이다.
우리가 세계인의 축제라 할 올림픽을 통해 얻는 교훈은 권력과 자본에 의해서도 영토화되지 않는 우리 자신의 발견일 것이다. 이상이 라디오를 통해 들었던 베를린올림픽으로부터 76년이 지난 2012년 여름, 열대야의 나날 속에서도 런던올림픽의 승전보를 기대하며 새벽잠을 설치고 있는 우리의 부족한 수면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조각엔 또 다른 우리, 정복되지 않은 개개인의 총화로서의 우리가 있는 것이다. 그건 국가별 메달 집계와 시상식을 수놓은 우승국의 국가와 국기의 물결을 초월한다.
지금 이 순간, 여름방학으로 텅 비어 있는 학교 운동장을 점령하고 있는 것은 매미 울음과 태양뿐이다. 대신 수평적 의미의 운동장은 런던올림픽을 생중계하고 있는 디지털 방식의 고화질 TV 화면으로 대체되어 있다. 수평적 운동장이 평면 4각의 TV 화면이 되어 수직으로 직립해 있는 것이다. 거기엔 우리의 기억 속 초등학교와 그 이전의 논두렁과 골목길에서의 질주가 아로새겨져 있다. 그 질주는 개인의 몸과 자아에 새겨진 자연과의 교섭의 흔적이며 이 시대를 횡단하는 가로지르기 그 자체다. 식민지 시대를 살아야 했던 이상이 1937년 도쿄에서 만 27세로 숨을 거둘 때조차 그는 세계 시민의 일원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대는 달라졌다. 2012년 런던올림픽이 주는 교훈은 우리의 신체에 새겨진 시간을 통과해 세계 시민의 광장으로 나아가는 또 다른 질주의 가능성이다. 저어기 제1, 제2, 제3의 이상이 질주하고 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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