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정, 그 끝을 찾으려는 인류여정… ‘측정의 역사’

Է:2012-05-31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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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정, 그 끝을 찾으려는 인류여정… ‘측정의 역사’

측정의 역사/로버트 P. 크리스/에이도스

측정만큼 인간사에서 본질적인 것은 없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모든 것을 견주어보고 잰다. 거리는 얼마이고 시간은 언제인지, 땅의 생산량과 노동의 양은 어느 정도인지, 거래에서 공정한 표준은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

대니얼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임시방편의 척도가 나온다. 15년이나 무인도에 갇혀 있는 크루소는 어느 날 바닷가에서 사람의 맨발 자국을 발견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동안 사람의 그림자조차 마주친 적이 없는 그는 겁에 질린 채 온갖 공상에 시달린다. 결국 그는 다시 해안으로 돌아가 그 발자국에 자신의 발을 대본다. 발자국은 자신의 발보다 훨씬 컸다. 불의의 습격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동굴을 안식처로 삼아 살아간다.

크루소가 사용한 단위는 자신의 발이다. 이처럼 인류 최초의 측정 도구는 인체였다. 발은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대부분의 문화권엔 ‘발’ 단위가 있으며 발 길이는 ‘손가락’ 굵기로 나누기도 한다. 고대그리스에서는 발 길이를 ‘푸스’, 손가락 굵기를 ‘닥틸로스’라고 불렀고, 1푸스는 16닥틸로스였다. 중국에서 발 길이는 ‘척’, 엄지손가락 굵기는 ‘촌’이며 1척은 10촌이다. 줌(주먹으로 쥘만한 분량), 움큼(한 손에 잔뜩 움켜 쥔 분량), 자밤(나물·양념 따위를 손가락 끝으로 잡을 만한 분량) 등은 지금도 요리할 때 쓰는 척도이다. 이처럼 도량형은 한 사회가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이자 문화나 사회적 역학관계를 보여주는 핵심 개념이다.

중국에서 가장 과학적인 방법으로 도량형을 도입하고 이를 칙령으로 반포한 이는 한대(漢代) 중기의 황제 왕망이었다. 그는 도량형의 정의를 기록으로 남기는 전통을 세웠고 청동제 측정기구를 처음 보급했다. ‘한서’에 따르면 아악기의 음을 정확히 맞추기 위해 황종관이라고 하는 율관을 제작했는데 검은 기장을 황종관에 가득 채웠을 때의 개수로 부피를 정의했다. 황종관의 길이는 9촌(0.9척)이었는데 이는 검은 기장 90알을 나란히 붙인 것과 같았다. 또 황종관을 가득 채운 1200알의 부피를 1약(?)으로, 100알의 무게를 1수(銖)로 정의했다. 서아프리카의 아칸족은 강이나 바다의 모래에서 채취한 사금의 무게를 달 때 놋쇠 저울추를 이용했다. 사금을 채취한 사람들의 주머니에는 늘 놋쇠 저울추가 있기 마련이었고 140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 놋쇠 저울추는 수백만 개나 제작됐다. 그들은 저울추를 무게 측정 말고도 세금, 벌금, 서비스, 상업 등의 가격 표준을 평가하는 다양한 용도로 썼다.

프랑스에서는 중세 때 중앙정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제 나름의 도량형을 써온 지방 영주들의 힘이 약해지자 중앙정부는 공통의 도량형을 시행하고 이를 관리할 필요성이 커졌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측정 체계 또한 단기간에 급작스런 변화를 겪는다. 그해 8월 프랑스 아카데미는 통일된 도량형 표준의 제정을 국민의회에 청원하자고 제안했고 자신들의 대변자로 성직자 총대표인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을 선정한다. 탈레랑은 “도량형의 난맥상은 정신을 혼란시켜 상거래를 저해한다”라고 선언한 뒤 아카데미에 두 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하달한다. 한 위원회는 십진법을, 다른 위원회는 자연 표준을 연구했다.

1791년 3월 19일, 위원회는 파리를 지나는 사분 자오선의 1000만 분의 1을 기본 길이 단위로 지정하는 방안을 채택했고 그 결과, 미터법이 확정됐다. 아카데미는 기왕이면 자기네 표준을 모든 나라가 채택하도록 설득하고 싶었다. 그래서 자국의 특수이익을 증진한다는 의심을 지우기 위해 ‘척도’를 뜻하는 그리스어 ‘메트론(metron)’에서 유래한 ‘미터’를 기본 길이 단위의 명칭으로 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 열기에 경계심을 품고 있던 영국은 탈레랑이 이 열기에 편승해 새 도량형을 확립하려는 것에도 경계의 눈길을 보냈다. 당시 영국 개혁가들은 세계 제일의 산업국이던 영국에서 도량형 개혁을 급작스럽게 추진할 경우 경제 성장이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1814년 로마에서 물려받은 단위를 바탕으로 한 야드파운드법을 공식 채택하고 대영 제국 전역에서 사용하도록 했다.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벌어진 도량형 신경전은 1863년 미국 국립과학아카데미가 프랑스의 미터법을 채택함으로서 미터법의 승리로 종결된다. 저자는 불과 200여 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현대의 바벨탑으로 불리는 보편 측정 체계로 통일된 일은 전 세계 언어가 통일되는 것만큼 혁명적인 사건이었다고 주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전 세계가 킬로그램의 표준으로 삼고 있는 파리 외곽의 국제도량형국에 보관된 ‘백금-이리듐 원기둥’의 운명이다. 1988년 국제 킬로그램 원기(原器)를 금고에서 꺼내어 6개 사본과 비교하던 중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앞서 1946년 검증했을 때에도 사본들 사이에 미세한 차이가 발견되기는 했다. 이유는 공기가 표준기 표면에서 화학반응을 일으켰거나 표준기 안에 들어 있던 기포가 빠져나갔기 때문으로 추측됐다. 하지만 1988년 검증 결과, 문제는 더 심각했다. 사본들과 원기의 질량이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질량 차이는 50마이크로그램 이상이었다. 해마다 원기 질량이 20억분의 1씩 달라진 셈이었다.

그 결과 2011년 1월 24일 런던에서 열린 왕립학회 회의에서는 킬로그램 원기의 안정성이 의심스럽다며 질량 표준의 정확도를 높일 것을 결의했다. 현재 킬로그램 원기를 대체할 표준으로, 단결정(어떤 고체 안에 존재하는 원자, 이온, 분자가 규칙적인 3차원 배열을 가지는 것) 규소로 만든 공의 아보가드로 상수를 측정해 원자 개수를 질량 단위로 삼는 ‘아보가드로법’과 양성자의 전기적 성질까지 측정할 수 있는 ‘와트 저울’로 킬로그램 질량을 재측정해 표준으로 삼자는 두 가지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둘 중 어떤 게 채택되더라도 킬로그램 원기는 파기되는 것이다.

사실 조물주는 자도, 저울도 창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이렇듯 측정과 불변의 척도를 찾으려는 열정으로 점철돼 왔다. 머지않아 삶의 질이나 행복 같은 추상적인 것도 측정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할지도 모른다. 저자는 미국 뉴욕 스토니브룩 대학 철학과 교수. 노승영 옮김.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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