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출판] 이제, 요더를 읽자!… ‘진정한 제자도’가 사라지는 한국교회에 던지는 메시지

Է:2012-05-29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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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출판] 이제, 요더를 읽자!… ‘진정한 제자도’가 사라지는 한국교회에 던지는 메시지

최근 전 세계적으로 급진적 제자도(Radical Discipleship)와 비폭력 평화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일찍부터 이를 주창한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1927∼1997))와 그의 저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요더는 평화주의에 대한 논의의 시각을 정립하는데 크게 기여한 메노나이트 신학자이며 기독교 윤리학의 거장. 그는 2000년 교회사에서 가장 저주받은 이름이자 불온한 집단이었던 아나뱁티스트(anabaptist)를 복권하고 현대의 언어로 재진술한 뛰어난 학자다. 종교개혁 당시 루터와 칼뱅의 정신을 극한의 지점까지 밀어붙인 급진적 제자도는 가톨릭은 물론이고 개신교에서도 모진 박해를 받았다. 그럼에도 국내외적으로 ‘요더의 후예들’은 꾸준히 그의 정신을 전파하며 진정한 제자도가 사라진 교회, 갈등이 폭력으로 쉽게 전이되는 세속 사회 속에서 기독교적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도서출판 대장간과 IVP등에서 사명감을 갖고 요더의 책을 출간하고 있다.

요더의 ‘예수의 정치학’(IVP)은 보수적인 미국 기독잡지 ‘크리스채너티 투데이’가 선정한 20세기의 책 100권 중 5위를 차지했다. 아나뱁티스트라는 핸디캡을 감안하면 이변이다. 리처드 마우, 스탠리 하우어워스, 리처드 헤이스, 글렌 스타센, 사무엘 에스코바르, 낸시 머피, 제임스 맥클랜던 등 출중한 신학자들은 요더 때문에 자기들의 삶이 바뀌었다고 이구동성으로 고백한다.

거칠게 말해 이미 서구 자체에서 종교개혁적 동력은 소진되었고, 토양과 조건이 판이하게 다른 탈기독교세계(Post-Christendom)인 한국에 그것을 적용하기란 애초부터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종교개혁 전통의 일부이면서도 한계를 처음부터 지적했던 급진 종교개혁은 유력한 대안이다. 때문에, 나는 “21세기는 존 요더의 시대”라는 대담한 선언을 주저하지 않는다.

요더를 읽기란 쉽지 않다. 문장이 난해하다. 번역자들 모두 혀를 내두른다. 사상도 간단하지 않다. 천재적인 이 신학자는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 아무리 자상해도 그의 신학적 지평과 전제가 너무 낯설어서 이해하기 어렵다. 그간의 통념을 마구 뒤흔드는 통에 정신이 없다. 그러나 요더를 읽으면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애써 독서한 보상은 두둑하다.

무엇보다도 ‘근원적 혁명’(대장간)을 추천한다. 이 책은 요더의 신학 전체를 온축하고 있다. 근원이란 “예수가 주님이시다”는 신약과 초대교회의 고백을 말한다. 이 신앙은 한편으로 세상과 타협하고 순응한 교회의 혁신을 요청한다. 교회가 머리인 예수를 따르기보다는 국가와 세상의 조류를 뒤쫓을 때가 많았다. 다른 한편으로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의 제자로 우리를 소환한다. 복음을 폭력과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전하는 것이야말로 예수의 주되심과 거리가 멀다.

우리에게는 어떤 것보다도 비폭력적으로 저항하는 평화주의(pacifism)에 대한 거부감이 많다. 대번에 질문이 쏟아진다. 구약의 하나님의 전쟁은? 적이 우리나라를 쳐들어온다면? 가족과 친구가 위협 받으면? 그런 당신이라면 요더가 쓰고 편집한 ‘당신이라면’(대장간)을 권한다. 그 물음이 내장하는 갖가지 오해와 오류에 대한 풍성한 대답이 있다. 예수님이 실제 내 삶에서도 주인인지를 테스트하는 리트머스가 바로 폭력이다. 폭력적 상황에서도 예수는 주님인가? 나는 그의 제자인가?

그의 교회론은 다음 책을 보면 된다. ‘근원적 혁명’에서 산상수훈 공동체로의 회복을 촉구한 요더는 교회 내에서 이루어지는 만찬과 침례 등이 갖는 혁명적 의의를 ‘교회, 그 몸의 정치’(대장간)에 담았다. 또한 성직자라 불리는 종교전문가만이 아닌 평신도로 분류되었던 모든 성도들이 참여하는 바울의 혁명적 목회 비전을 ‘그리스도의 충만함’(대장간)에 오롯이 실었다. 예수가 얼마나 정치적이었는지는 ‘예수의 정치학’을, 그를 따르는 제자도 역시 정치적이라는 것은 ‘제자도,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책임’(KAP)에서 살펴보면 된다.

원초적인 복음임에 틀림없으나 “날 것 그대로 살아내자”는 요더는 부담스럽다. 본디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그렇다. 어려운 독서생태계에서 이문이 별로 없는 요더총서를 출간하는 출판사 대장간도 좁은 예수의 길을 걷는 셈이다. 독자가 날마다 더하기를 바란다.

요더만이 유일한 대안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신학과 윤리, 교회의 재구성을 위해서는 요더를 피할 길이 없다. 어떤 형태로든 통과해야 전망과 희망이 있다. 그렇다면 십자가 앞의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 것이다. “만일 요더를 읽지 않고서는 그가 제시한 급진적 제자도와 평화주의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면, 당신의 뜻대로 그를 진지하게 읽기를 원하나이다.”

김기현 목사 (부산 로고스서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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