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인문학] 왕의 목을 자르고 청교도 국가 세운 올리버 크롬웰 (下)

Է:2012-05-21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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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인문학] 왕의 목을 자르고 청교도 국가 세운 올리버 크롬웰 (下)

독재적이었지만 유능했던 크롬웰, 모세와 같은 역할을 꿈꿔

올리버 크롬웰은 네이즈비 전투에 이어 1645년 7월 10일 랭포트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찰스 1세는 남아 있는 대다수 왕당파 군대를 모아 전투에 나섰다가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이후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지만, 이미 전세는 완전히 기울었다. 1645년 11월 5일 찰스 1세는 궁정과 군사령부가 있는 옥스퍼드로 되돌아 왔다. 크롬웰의 군대는 1646년 봄 찰스 1세가 머무르고 있던 옥스퍼드를 포위 공격했다. 찰스 1세는 그해 4월말쯤 변장을 하고 2명의 동행인과 함께 옥스퍼드를 빠져나와 5월 5일 스코틀랜드 군대에 투항했다. 스코틀랜드 군대는 의회파의 승리를 인정하고 귀국하면서 왕의 신병을 의회파에게 넘겼다. 왕당파가 그해 6월에 옥스퍼드에서 공식적으로 항복함으로써 제1차 내전은 끝이 났다.

1647년 2월 크롬웰은 한 달 가량 병을 앓았다. 그가 병이 낫고 정치에 복귀했을 때, 의회는 왕의 처리 문제로 시끄러웠다. 의회의 다수가 영국 국교회의 감독제를 장로교 체제로 바꾸는 대신 찰스 1세를 복귀시키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크롬웰과 그를 지지하는 독립파들은 요구에 반대했다. 스코틀랜드의 장로제로 바꾼다고 해서 교회의 권위적 위계질서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특정 종파를 따르도록 강요하는 것은 청교도들의 단합을 깨뜨릴 수도 있었다. 의회와 군대 간에 점점 갈등이 커지기 시작했다.

의회는 1647년 봄 군대 대부분을 해산시켰다. 돈에 쪼달린 의회는 그들에게 약속한 봉급도 지급하지 않았다. 군대는 밀린 봉급을 받고 의회에서 종교적 관용을 확보할 때 까지 해산에 응하지 않았다. 신모범군을 이루고 있는 많은 청교도 독립파들은 획일화를 거부하고, 자유롭게 종교 집회를 열 수 있는 권리를 요구했다. 의회는 1647년 여름과 1648년 가을에 왕과 협상을 벌이면서 왕이 받아들일만한 조건들을 수락하는 데까지 점차 후퇴하였다. 군대는 런던으로 진입해 의회에 압력을 가했다. 그런데 장기의회의 부패와 전횡을 비난하던 군대 내에서도 갈등이 벌어졌다. 하급사관 ·병사 중심의 수평파와 간부 중심의 크롬웰의 독립파가 충돌했다. 수평파는 성인 남자의 보통선거권, 의석의 재분배, 법률상의 완전한 평등 등을 요구했다. 또한 그들은 소시민의 편에서 상거래 독점 폐지, 토지 개방, 등기 소작농에 대한 기한의 법적 보증 등 경제 개혁을 주장했다. 더 나아가 자의적인 불법적 징병 금지, 성경에 근거가 없는 10분의 1세 폐지와 신앙과 결사의 완전한 자유를 보장할 것 등을 요구했다. 수평파는 이러한 요구를 담아 ‘인민협약’을 채택하고 선포했다.

그러나 크롬웰의 독립파는 이러한 요구가 너무 급진적이라 수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수평파 사병 대표들과 독립파 장교들은 퍼트니 교회에서 논쟁을 벌였지만 뚜렷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수평파는 제2차 내란이 발발하자 일시적으로 독립파와 제휴했지만 혁명 이후 크롬웰에게 무력으로 진압당하고 만다.

의회파 진영에서 이런 갈등이 빚어지는 틈을 타 찰스 1세는 햄프턴 궁을 탈출했다. 탈출에 성공한 찰스 1세는 프랑스로 가려 했으나, 계획이 어긋나는 바람에 아일오브와이트로 가게 되었다. 충실한 의회파인 그곳 주지사는 찰스 1세를 케러즈브룩 성에 가두고 감시했다. 이곳에서도 찰스 1세는 계속해서 의회와 스코틀랜드인들을 대상으로 협상을 하며 음모를 꾸몄다. 찰스 1세는 의회파 사이의 갈등을 조장했다. 그는 감시를 받으면서도 계속 외부와 비밀 연락을 하며 국면 전환을 꾀했다.

찰스 1세는 의회파 내부의 갈등을 조장하는 한편으로 장로교회를 지지하는 체하면서 스코틀랜드 군대의 영국 침입을 유도하였다. 2차 내전이 발발한 것이었다. 왕은 다시 왕당파의 재결집을 시도하였다. 크롬웰은 남부 웨일즈의 왕당파 반란을 진압했다. 1648년 8월 찰스 1세의 음모대로 스코틀랜드 군대가 영국을 침입하였다. 크롬웰이 9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나갔다. 스코틀랜드의 군사는 그 배가 넘었다. 크롬웰이 단독으로 지휘한 군대는 스코틀랜드 군대를 격파했다.

찰스 1세와 스코틀랜드 장로교도가 공모했다는 소식을 들은 독립파는 격분했다. 크롬웰은 마침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해 12월에 열린 의회에서 그의 병사들은 의회를 기습했다. 왕과 협상을 주장하는 장로파를 숙청하는 ‘교만의 숙청(Pride's Purge)’을 한 것이었다. 의원 가운데 약 절반이 체포되거나 의원직이 박탈되었다. 아수라장이 된 의회에 나가기를 거부한 의원들도 꽤 되었다. 크롬웰을 지지하는 삼분의 일 정도의 의원만이 남아서 의회를 운영했다. 이를 ‘잔부 의회’라고 부른다. ‘잔부 회의’는 크롬웰의 꼭두각시나 마찬가지였다. 이 ‘잔부 의회’는 1649년 1월 찰스 1세의 재판을 추진해 1649년 1월 30일 그를 처형했다. 내친 김에 귀족원도 폐지했다. 이렇게 해서 영국 최초로 영국 공화국이 탄생했다.

최초의 영국 공화국에서 크롬웰은 ‘국무회의(Council of State)’ 의장이 되었다. 그러나 왕이 처형되었고 새로운 국가체제가 들어섰어도, 반란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스코틀랜드에서는 찰스 2세를 새로운 왕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왕당파들은 아일랜드에서도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크롬웰은 좌시할 수 없었다. 1649∼1651년에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정벌에 나섰다. 1650년 9월 던바 전투에서 스코틀랜드 군을 물리쳤고, 1651년에는 영국으로 공격해오는 찰스 2세의 군대를 우스터에서 격파했다. 결국 1651년 10월 찰스 2세가 프랑스로 탈출하면서 10년 동안 계속된 영국내전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전쟁 기간 동안 크롬웰이 보여 준 잔인함에 대해 비난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1649년 8월에 크롬웰은 아일랜드의 드로이다를 점령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2000명을 학살해 버렸다. 갓난아이도 살려 두지 않았으며, 교회로 대피한 시민들을 교회의 문을 잠근 채 불태워 버렸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잔학상은 반란의 생각조차 없애려는 그의 치밀한 의도가 작용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크롬웰은 국내 정치에서도 단호했다. 급진적인 평등을 주장하는 수평파도 무력으로 탄압했다. 거칠 것 없는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통치 장전’을 제정하여 1653년 12월 16일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 세 나라를 통치하는 호국경의 자리에 올랐다. 호국경은 로마 시대의 호민관을 본 뜬 직위였다. 주변에서는 그를 왕으로 추대했지만 공화정에 대한 소신 때문에 이 제안을 거부하였다.

크롬웰은 독재적이지만 유능하고 양심적인 정치가였다. 그는 법률 개혁과 교육 진흥 등 사회 개혁을 추진했다. 또한 유대인의 입국을 허용하는 등 종교에도 관용정책을 폈다. 1655년 왕당파의 반란이 일어나자 그는 전국을 10여개의 군사구역으로 나누어 군정장관을 배치하는 등 군정을 강화했다. 1658년 크롬웰은 말라리아에 걸려 런던의 화이트홀에서 5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가 죽자 권력은 그의 아들 리처드 크롬웰에게 넘어 갔다. 그러나 아버지 크롬웰의 철권통치에 대한 반발이 워낙 거셌다. 결국 1660년에 찰스 2세가 의회파의 승인으로 왕이 되면서 왕정복고가 일어났다. 크롬웰은 1661년 왕을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무덤이 파헤쳐진 뒤 목이 잘렸다. 처형은 상징적으로 찰스 1세가 죽은 1월 30일에 시행되었다.

크롬웰은 자신의 역할을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된 땅으로 인도하는 모세처럼 여겼다. 그는 지금 영국민들이 이집트, 즉 스튜어트 왕조에 구속되어 있다가 국왕 처형으로 상징되는 홍해를 넘어 사막을 건너는 것으로 해석했다. 자신이 이끄는 군대의 승리로 보여주는 하나님의 섭리는 불기둥과 같이 영국민들을 인도하고 있다. 크롬웰은 반란을 일으키거나 동조하는 영국민들은 사막에서 저항하며 불평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들의 팔을 틀어쥐고서라도 약속된 땅으로 이끌고 가야 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도 모세처럼 약속된 땅은 끝내 보지 못했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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