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인문학] 왕의 목을 자르고 청교도 국가 세운 올리버 크롬웰 (中)
“왕당파 타도는 하나님이 내린 심판” 의회군 신앙 무장시켜
올리버 크롬웰은 43세의 나이로 전쟁에 참가했다. 그때까지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직업군인 과는 거리가 멀었다. 크롬웰은 1599년 4월25일 잉글랜드 동부 케임브리지셔 헌팅턴의 젠트리 집안에서 태어났다. 젠트리는 영국에서 중세 후기에 생긴, 토지를 소유한 중산계층을 말한다. 보통 신분적으로는 귀족 아래지만 귀족처럼 가문의 문장을 사용할 수 있다. 젠트리로서 대지주였던 아버지 로버트 크롬웰(Robert Cromwell, 1560∼1617)은 엘리자베스 1세 때 의원을 지냈다.
크롬웰은 청교도 분위기가 강한 케임브리지의 대학에서 공부를 했고, 처음으로 그 영향을 받았다. 1617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학위를 끝맺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어머니와 7명이나 되는 누이들을 돌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1620년 런던의 부유한 상인의 딸인 엘리자베스 부처와 결혼해 5남4녀를 낳았다.
크롬웰은 1628년 고향 헌팅턴에서 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의원 생활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했다. 찰스 1세가 이듬해 의회를 해산하고 11년 동안 소집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의회 해산 기간 크롬웰은 개인적으로 우울증에 시달린 것 빼놓고는 유복한 중산층의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1631년 땅과 소유물을 처분한 뒤 고향 헌팅턴을 떠났다. 아마도 헌팅턴의 새로운 정책과 관련한 다툼이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세인트 아이브스로 이사했다가 다시 엘리로 갔다. 외삼촌의 유산을 상속 받아 더 많은 부를 축적한 그의 가문은 영향력 있는 젠트리 가문이 되었다. 그는 찰스 1세의 세금 부과 및 종교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청교도들 사이에서 지도적인 인물이 되었다.
1640년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와의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다시 의회를 소집했다. 크롬웰은 케임브리지를 대표하는 의원으로 출석했지만 의회는 단기로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 열린 장기 의회에서 그는 다시 의원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의 전쟁에 참가할 당시 그는 이 장기 의회 의원 신분이었다. 그때 그의 군대 경험은 고작 지역방위군인 민병대 경험뿐이었다. 그가 전쟁에 참가할 때 의회파는 왕당파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 기마를 소유한 다수의 귀족으로 구성된 왕당파의 기동력을 의회군은 당해낼 수가 없었다. 크롬웰은 패전의 문제점을 냉철하게 분석했다. 왕당파와 같이 민첩한 기병대가 필요했다.
우선 그는 고향으로 달려가 60명의 기병대를 모집하고 조련했다. 그가 지휘하는 기병대는 1642년 10월23일 에지힐 전투에 모습을 나타냈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그는 이후 병사를 더 충원해 기병 연대로 편성했다. 그는 기병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하기 위해 엄격한 군율을 적용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군인의 사기를 올려야 했다. 그는 최고의 장비와 충분한 보수를 지급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쟁에 임하는 군인들의 정신적 태도였다. 그는 이 전쟁이 의로운 전쟁이며, 왕당파를 타도하는 것이 하나님이 내린 심판이라는 점을 군인들에게 주입시켰다.
그의 기병대는 1643년 7월 게인즈버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1644년 7월 마스턴무어 전투에 그의 기병대는 맨체스터 백작이 이끄는 동부연합군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그는 이 전투에서 왕당파 기사들이 중심이 된 기마기갑 부대와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크롬웰은 기병대 맨 앞에 서서 싸우다가 목에 가벼운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잠시 치료를 받은 다음 계속 전투를 지휘해 승리를 거두었다. 전투에서 승리한 크롬웰과 그의 기병대는 철기대(Ironsides)라는 명성을 얻었다. 의회파는 이 전투에서 승리해 전세를 뒤집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의회파의 지도자들은 일사불란하지 못했고 우유부단했다. 급히 모집된 의회군은 숫자는 많았지만 오합지졸이나 마찬가지였다.
크롬웰은 지금과 같은 오합지졸로는 앞으로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1645년부터 그는 의회군의 전체 기병대를 지휘했다. 의회군의 총사령관은 토머스 패어팩스 경이었다. 용감했지만 전체 군대를 지휘하기에는 경륜이 부족한 33세의 젊은이였다. 실질적인 지휘자 역할은 크롬웰이 맡았다.
의회파는 크롬웰의 철기대를 육성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새로운 모델의 군대, 즉 신모범군(New Model Army)을 만들었다. 크롬웰은 우선 청교도 신앙심이 깊고 전투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을 장교로 임명했다. 그리고 이전에 해오던 방식으로 사병들을 조련했다. 사병들을 조련할 때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신앙심으로 무장하는 것이었다. 이 전쟁이 불의한 세력에 대한 곧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점을 병사들에게 주입, 병사들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전쟁터에 나서게 했다.
1645년 6월에 신모범군은 노샘프턴셔의 네이즈비에서 왕당파 군대와 결전을 벌였다. 왕당파의 군대는 9000명으로, 의회파 1만4000명에 비해 열세였다. 전투 초반에는 왕당파가 승기를 잡는 듯했다. 찰스 1세의 군사령관 루퍼트 경이 기병대를 이끌고 돌격해 의회파 진영의 좌익을 물리쳤다. 그 기세를 몰아 왕당파 보병대가 의회파 진영을 향해 돌격했고 접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루퍼트 경의 기병대는 앞으로만 돌격해 나가다가 적진 깊숙이 너무 들어가 고립되었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측면에 있던 크롬웰의 군대가 왕당파의 기병대와 보병대를 갈라놓은 다음 보병대를 공격해 섬멸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찰스 1세는 경악한 나머지 예비 병력을 투입하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이처럼 내란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을 때, 런던에서는 신학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열린 것이었다. 청교도 중심의 의회는 영국의 종교개혁적 전통이 왕에 의해 위협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신앙을 확립할 필요성을 느꼈다. 의회는 찰스 1세의 반대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1643년 7월1일 역사적인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개최하였다. 참석자는 상원에서 10명, 하원에서 20명, 전국에서 뽑힌 121명의 신학자와 목회자로 구성되었다. 구성원 대부분이 장로교도였다. 의회는 1643년 9월 스코틀랜드의 도움을 얻기 위해 ‘엄숙한 동맹과 계약’을 체결했고, 스코틀랜드 대표단도 웨스트민스터 총회에 초청했다.
총회는 처음에 39개 신조를 수정하고자 했다. 그러나 수정보다는 전면적 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아져 새로운 신앙고백서를 채택하기로 결의했다. 총회는 1644년 8월 신앙고백서 작성위원회를 조직해 1646년 11월 새로운 신앙고백서를 의회에 제출했다. 이 신앙고백서가 바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이다. 이 신앙고백서는 영국과 스코틀랜드 의회의 승인을 받았고, 이후 스코틀랜드와 미국 장로교회의 표준문서가 되었다. 이 신앙고백서는 영국 교회의 신학적 전통과 칼뱅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성경에 기록된 것만 따르고자 했다. 신조는 성경에 근거가 없는 것은 배제했다. 이 신앙고백서는 영국 왕에 대한 의회의 저항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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