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마가를 찾아서] (18) 마가는 왜 안디옥에 갔을까?
사업 기반닦은 마가, 사울의 가죽제품 기술과 뛰어난 학문에 이끌려…
소설 ‘마르코스 요안네스’를 구상하면서 필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하던 마가가 그곳에 폭동의 조짐이 있었던 AD 40년경 귀국한 것으로 설정했었다. 유대에 돌아온 그는 모친과 외삼촌을 통해 지난 10년 간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 듣고, 또 사도들의 사역과 교회의 성장을 직접 지켜보며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확인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가는 당장 교회 일에 뛰어들기보다 부친의 사업을 복구하는데 열중했다. 교회 공동체가 허술한 재정 관리로 운영이 어려워지면 뒤에서 물질적으로 돕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천하에 큰 흉년이 들리라”(행 11:28)
선지자 아가보의 그 예언도 마가로 하여금 사업에 더욱 열중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필자는 그가 앞으로 다량의 곡물을 수입해야 한다면 그 대전을 지불하기 위해 당장 수공예품을 중심으로 하는 수출 산업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던 중 AD 44년 아그립바 Ⅰ세의 박해로 야고보 사도가 순교하고 베드로는 예루살렘을 떠났다. 예수의 아우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책임자로 피택된 후 곧 예루살렘에 흉년이 들어 대기근이 시작되었다. 재산을 팔아 ‘통용’하던 교회 공동체의 재정은 마가의 예상대로 파국에 직면했다. AD 46년 바나바와 사울은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이 모은 부조금을 전달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그리고 마가는 그들을 따라 안디옥으로 간다.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행 12:25)
필자가 설정한대로 그가 부친의 사업을 복구하는데 열중하고, 특히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 수출 산업을 일으키기 시작했다면, 아무리 외삼촌 바나바가 강권했다고 해도 그들을 따라갈 수가 없었을 것이다. 마가는 왜 외삼촌과 사울을 따라서 안디옥으로 갔던 것일까? 물론 바나바가 예수께서 곧 다시 오실 것이라는 절박한 종말론적 논리로 마가를 다그쳤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마가가 10년 동안 알렉산드리아의 학자들로부터 수학과 철학을 배운 지식인이었다면 바나바의 일방적 강권에 그리 쉽게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가가 외삼촌 바나바와 사울을 따라 안디옥으로 간 이유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전 3:1)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때’이다.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다고 한 것과 같이 사업은 들어가고 나가는 때를 맞추어야 한다. 마가가 AD 40년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5년 동안 부친 시대의 영업망을 복구하고, 곡물의 수입과 수공예품의 수출을 시작했다면 사업의 기반을 상당히 갖추어 놓은 때였을 것이다. 이미 욥바와 가이사랴의 항구에는 화물 선적과 하역의 기반을 마련했을 것이고 알렉산드리아와 예루살렘을 비롯해 여리고와 사마리아 등에도 거점을 확보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에 필요한 것은 판매망의 확대였다. 당시 지중해 교역의 중요한 거점들은 알렉산드리아와 욥바와 가이사랴 그리고 수리아의 안디옥과 소아시아의 에베소에서 고린도로 건너가 로마와 마실리아와 카르타고를 돌아 구레네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거점들을 선점하여 지중해의 상권을 장악한 것이 두로의 페니키아 상인들이었다.
“네 땅이 바다 가운데 있음이여 너를 지은 자가 네 아름다움을 온전하게 하였도다”(겔 27:4)
그들은 바다 가운데 있는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모든 나라들과 교역하여 장사에 성공했으나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만들어 그 나라들을 타락하게 만들었다.
“네 큰 지혜와 무역으로 재물을 더하고 그 재물로 말미암아 네 마음이 교만하였도다”(겔 28:5)
그러므로 마가가 AD 40년 경에 알렉산드리아와 예루살렘에서 사업을 시작하여 다시 판매망의 확장을 도모했다면 우선 그 첫 단계는 페니키안 루트를 따라 안디옥에 진출하는 것이었다. 안디옥은 로마가 동방 진출의 거점으로 삼았던 전략적 요충이고 교역에서도 지중해와 메소포타미아 즉 바다와 대륙을 연결시켜 주는 교통의 요지였다. 마가가 바나바와 사울을 따라간 AD 46년은 바로 그의 사업이 안디옥으로 진출해야 하는 절실한 시점이었다. 그리고 마가가 그들을 따라갔던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사울이 지니고 있는 기술 때문이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사울은 자비량 선교를 했는데 그는 가죽 제품의 기술자였기 때문이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행 18:3)
당시 유대가 수공업으로 생산할 수 있는 제품 중 우선 원자재를 구하기 쉬운 것이 가죽과 양모였다.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때로부터 주로 목축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나 한발과 기근이 닥치면 더 이상 짐승을 기르기 어려워 도살을 하거나 죽게 버려두는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가가 우선 패션 사업의 핵심이 되는 가죽 제품에 착안했다면 물론 욥바의 가죽 업자 시몬(행 9:43)과도 협력을 했을 것이나, 사울의 경우라면 그 기술의 수준이 훨씬 위였을 것이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행 22:3)
알렉산더의 후계자 중 하나인 셀류코스는 수리아 지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가 안디옥을 거점으로 세운 안티오쿠스 왕조는 서쪽에서 밀려들어오는 로마의 신흥 세력과 충돌하게 되었다. 그 결과 길리기아는 수리아와 로마의 국경에 위치하게 되었고, 수리아 정부는 길리기아의 중심도시 다소의 자치권을 인정하게 되어 다소는 헬라의 문화와 로마의 상권이 공존하는 도시가 된 것이다. BC 65년 결국 로마의 수중에 들어간 다소는 웅변가인 키케로가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학자들이 모여드는 대학 도시가 되고 동시에 번영하는 상업 도시가 되었다. 사울은 그 다소에서도 상당한 재력가라야 받을 수 있는 로마 시민권을 지니고 있었다.
“네가 로마 시민이냐 내게 말하라 이르되 그러하다”(행 22:27)
사울 즉 바울을 심문하던 루시아 천부장은 그의 진술을 듣고 놀란다.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돈을 많이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이르되 나는 나면서부터라 하니”(행 22:28)
그가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자였다면 그의 집안은 다소에서 상당히 큰 규모의 사업을 경영했을 것이다. 또 그것이 가죽 산업이었다면 천막 뿐 아니라 신발과 가방 그리고 장신구와 의류 등 여러 종류의 세공 제품도 함께 생산하는 업체였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사울은 어려서부터 가죽 사업을 하는 가문에서 가죽의 생산 기술과 관리 그리고 제품 개발과 영업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익히면서 자라났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경험과 지식은 그 산업에 뛰어든 마가에게 반드시 필요하고 전수받아야 하는 기술이었다. 그러나 사울에게 쏠렸던 그의 또 다른 관심은 바로 그의 학문이었다.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행 22:3)
사울의 스승인 가말리엘은 당대 최고의 랍비이고 율법학자였다.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율법 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행 5:34)
사울은 비록 다소에서 태어나 자랐으나 베냐민 지파로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빌 3:5)이라고 자부했다. 그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하여 바리새인이 되었고, 유대인들이 스데반 집사를 돌로 칠 때 그 증인이 되었을 정도로(행 7:58) 청년 시절부터 명성이 높은 학자였다. 당시 교회를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성도들을 체포하기 위해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 지참하고 달려가다가 부활한 예수를 만나 오히려 그 복음의 전도자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행 13:1)
당시 유대의 율법과 헬라 학문을 조화시키려 애쓴 알렉산드리아의 대학자 필로와 헬라 학문의 바탕에 가말리엘의 직계 제자인 다소의 사울은 유대 출신의 대표적 학자였다. 그런데 그 사울이 갑자기 나사렛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된 것이다. 헬라의 수학과 철학 그리고 외삼촌 바나바의 열정적 신앙 사이에서 멈칫거리고 있던 마가는 그런 사울에게 강렬한 호기심을 느꼈을 것이고, 그의 내면을 탐색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김성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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