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16) 피렌체의 사보나롤라

Է:2012-04-22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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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재의 ‘영성의 발자취’] (16) 피렌체의 사보나롤라

종교개혁 새벽을 열고 피렌체 광장에 순교의 피 쏟아

역사는 어떻게 변화하는가? 역사의 개혁은 영성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피렌체에서 이것을 묻는 것은 이곳 출신 개혁자 사보나롤라 때문이다. 사보나롤라는 누구인가? 그는 훗날 종교개혁자들이 생각한 대로 개혁의 첫 번째 봉화를 든 사람인가?

사실 오늘날의 피렌체는 이런 심각한 질문을 제기하기에는 잘 맞지 않는 도시 같다. 왜냐하면 도시 전체의 분위기가 비극적으로 죽은 15세기의 순교자를 기억하기에는 너무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래도 억지로라도 그의 발자취를 더듬기 위해 길을 떠나면 그의 발자취는 피렌체 도처에서 발견된다.

우선 두오모 성당이 있다. ‘꽃의 성모교회’라고 불리는 이 교회는 어떤 시인의 말 그대로 “도시의 한가운데 피어난 영원한 구원의 꽃”과 같다. 건축가 브루넬레스키에 의해 1420년 공사에 착수하여 1434년 완성된 이 아름다운 교회에서 사보나롤라는 피를 토하며 피렌체 시민을 향하여 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름다운 성시를 이루자고 호소했을 것이다.

발걸음을 옮기면 지금은 시청사로 사용하는 몬테 베키오 궁전이 있고 그 옆에 시노리아 광장이 나온다. 피렌체의 역사가 한눈에 녹아 있는 곳이다. 이 광장에서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코시모 1세의 동상이다. 메디치 가문의 일원으로 피렌체를 중심으로 토스카나 대공국을 이룬 군주다.

그 우람한 동상 바로 옆에 작고 초라한 사보나롤라의 화형터가 있다. 사보나롤라는 이곳에서 1498년 5월 23일, 한때 그의 열렬한 팬이었으나 훗날 무서운 적대자로 돌아선 성난 피렌체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염 속에서 순교했다. 그리고 그의 뼈는 광장 옆을 가로지르는 아르논 강에 산산이 뿌려졌다.

그의 화형터 앞에 잠시 서서 물었다. 개혁은 무엇인가? 그리고 역사는 무엇으로 바뀌는가? 사보나롤라는 훗날 칼뱅이 제네바에서 했던 것처럼 피렌체에서 하나님이 통치하는 모범적인 복음 국가로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당시 피렌체는 유럽 르네상스의 중심이었다. 이곳에서 르네상스의 3대 거장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보티첼리가 자신의 전성기를 바쳤으며, ‘신곡’을 쓴 단테와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도 이곳에서 활동했다. 이 무렵 피렌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가문은 메디치(Medici) 가였다. 메디치 가문은 13세기에 금융업으로 이름을 날렸고 그로 인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14세기에 이르러 메디치 가문은 정치 쪽으로도 영향력을 넓혀 살베스트로가 처음으로 피렌체의 지도자가 되었고 뒤를 이은 조반니가 정치적 입지를 크게 넓혔다. 그리고 그의 아들 코시모에 이르러 영토는 크게 확장되고 드디어 최초의 피렌체 왕국으로 선포된다.

그러나 세속의 역사에는 반드시 어떤 공식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것은 돈은 정치권력과 결탁하고 결국 권력 중에서도 최고인 종교권력과 야합한다는 공식이다. 불행하게도 메디치 가문에 이 공식은 정확하게 적용된다. 메디치 가문은 결국 세속권력과 함께 종교권력을 장악하였고 그 열매는 그 가문이 배출한 두 명의 교황 조반니와 일렉산드로를 통해서 나타난다. 조반니는 훗날 교황 레오 10세가 되었고, 알레산드로는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되었다.

메디치 가문이 물론 역사에 아무런 유익도 남기지 않은 것은 아니다. 르네상스의 예술을 후원하고 진작시키는 데 있어서 메디치 가문보다 더 큰 공을 세운 가문이나 권력도 없다. 미켈란젤로, 라파엘 등을 후원하고 그 결과 현재 우피치 미술관에 남겨진 수많은 미술 작품들은 메디치 가문의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

사보나롤라가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에 파견된 것은 메디치 가문의 권력이 정점으로 치닫던 바로 그무렵(1481년)이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대담하게도 교황과 교회의 부패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메디치 가문의 세속적 통치도 강하게 공격했다. 그리고 부자의 교만과 사치 그리고 음란과 방탕함을 강하게 질타했다. 사회적인 도덕을 세우자고 주장하며 경건한 수도생활을 개혁의 방향으로 제시한 사보나롤라에게서 민중들은 어두운 중세를 비추는 떠오르는 샛별이었다. 가난과 권력에 눌린 민중들은 여름 한 나절의 소나기 같은 환호를 그에게 보냈다. 그 환호는 1494년,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사보나롤라가 평민들과 함께 그들을 용감하게 물리쳤을 때 절정에 달했다.

마침내 수도원장 사보나롤라는 피렌체의 최고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다. 1497년 사보나롤라는 강력한 종교개혁을 선포하면서 시 광장에서 보석과 의복 등 화려한 것들과 풍기를 문란케 하는 서적들을 수거, ‘허영의 화형식’을 가졌다. 그는 세속적인 음악을 금지하고 성가를 보급했으며 행정과 조세 개혁을 단행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게 공격한 대상은 교황 알렉산더 6세였다. 그는 자식을 다섯이나 둔 세속적인 교황으로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던 인물이었다. 교황은 군중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 사보나롤라를 어떻게 복종시킬까 노심초사하다 설교하지 말도록 지시하기도 하고 다른 방법으로 회유하기도 했으나 사보나롤라의 태도는 확고했다. 추기경 자리로 유혹하는 교황에게 그는 이렇게 선포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추기경의 붉은 모자가 아니라 오직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주신 바 순교의 피로 물든 붉은 모자입니다.”

결국 교황은 그를 반대한 무리의 선동을 들어주는 교묘한 방식으로 사보나롤라를 파문했고 화형에 처했다. 그에게 화형이 선고되자 이제껏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적대자로 돌변했고 사보나롤라는 군중들의 야유와 함께 그가 예언한 대로 순교의 붉은 피를 피렌체 바닥에 쏟았다.

사보나롤라는 어떻게 개혁했는가? 무엇보다 그는 당대에 보기 드문 용기의 사람이었다. 피렌체의 작은 수도원장이 당대 최고 권력의 교황을 상대로 과감하게 교회의 부패와 오류를 지적한 것은 대단한 용기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죄를 지적하는 용기와 함께 자기도 그렇게 사는 용기, 그것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용기도 포함한다. 그런 점에서 사보나롤라는 루터가 말한 대로 프로테스탄트 최초의 순교자인지 모른다.

그러나 강압으로 거룩해질 수 있을까? 그 개혁이 영적인 개혁이 되고 사람을 살리는 개혁이 되기 위해서 다만 힘으로 밀어붙인 개혁만으로 충분한가? 거룩은 오스왈드 챔버스의 말대로 단순히 예수님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완전함이 나의 부패한 육체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로 덧입혀지지 않은 어떤 정치적 개혁이 진정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그것은 시청광장 앞에서 ‘허영의 화형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을 통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도랑이 흐르기 시작하면 강도 흐른다는 자연의 원리는 역사의 변혁에도 통한다. 사보나롤라의 개혁은 어쩌면 존 위클리프(1302∼1384)와 요한 후스(1369∼1415)로부터 흘러 루터로 이어지는, 그 시대의 작지만 거센 도랑소리였을 것이다. 새벽은 어느날 갑자기 오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길고 어두운 밤과 싸워서 마침내 오는 것이다. 사보나롤라도 역사의 어둠과 싸워 개혁의 새벽을 열어간 당대의 수많은 시대정신 중 하나였다.

<한신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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