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두려움, 1950년 그 가을의 편지…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

Է:2012-04-12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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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두려움, 1950년 그 가을의 편지…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

조선인민군 우편함 4640호/이흥환 엮음/삼인

“어머님, 금번 내가 군대에 입대할 때 순덕 언니가 나의 도랑크(트렁크)를 가져갔는데 그 도랑크가 쇠 채워져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뜯고서 도랑크 안에 우엣치(윗도리) 힌(흰) 내복이 있겠으니, 추운데 그것을 원근에게 입히시오. 그러고 사용할 것이 있으면 다 끄내서 사용하여 주시오. 저는 군대 내에서 월동 준비로 모든 것 일절을 탔습니다. 그러니까 나의 염려는 마시고 월동 준비를, 없는 것이지만 만만하게 하고 나십시오.”(1950년 10월 13일)

한국전쟁 당시 평양에 있는 인민군 여전사 최순옥이 고향 황해도 안악의 어머니(강이덕)에게 쓴 편지다. 공책으로 묶여 있던 종이 한 장을 조심스레 뜯어내 편지지로 쓴 듯한데 종이 앞뒤에 빼곡하게 연필로 글을 메웠으면서도 글씨가 정갈하다. 1950년 10월 13일은 평양이 위태롭다는 소식이 들려오던 시기라 위험하다는 낌새라도 챘을 법한데 편지에서는 그런 위기감이 전혀 풍기지 않는다. 더구나 그때는 이미 안악이 미군 수중에 들어갔을 때이다.

“수치감을 무릅쓰고 다음과 같이 몇 가지를 부탁하려고 합니다. 발싸게(2, 3척) 양말(5, 6꺼리) 춘추용 도리닝구(2매) 난닝구(2, 3매) 상하의 내복(1벌) 사루마다(2, 3매) 명자용 흰 천(반 척) 겐장용 황천(20㎝) 장갑(한 꺼리) 약간의 금전, 반소데 삿쯔(1매) 엽서(20매) 등을 사서 속히 가지고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1950년 10월 15일 2대대 통신소대)

평양 내무성 2대대 통신소대 특무장이 된 아들 김준주가 평안남도 용강군의 아버지 앞으로 쓴 ‘시급한’ 부탁의 편지다. 할 말이 더 있으나 나중으로 미루겠단다. 밥 먹으러 가야 하니까. 특무장 아들은 ‘사루마다’ 없이 추운 겨울을 났을까, 궁금증을 자아낸다.

“조선에는 벌써 수박, 차메(참외), 도마도, 살구, 복싸, 앵두 추리가 평양시에 나가면 가가마당 울깃불깃할 겁니다. 나는 추리를 보면 당신 생각한답니다. 추리를 싸가지고 지베(집에) 오시겠지 하고 동무들과 함게 외게 된답니다… 끗트로(끝으로) 악쓰(악수) 키수(키스) 끝.”(1950년 6월 27일)

모스크바에 유학 중인 아내 김효진이 평양에 있는 남편에게 쓴 편지다. 편지 겉봉은 러시아어로 쓰여 있다. 헤어진 지 1년 째. 조선에서는 이틀 전에 전쟁이 터졌는데 아직 그 소식을 모르고 있다.

편지 더미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다. 미국 메릴랜드 주 칼리지파크의 국립문서보관소(NARA)에 있는 북한 문서 상자는 1100여 개에 달한다. 미군이 북한 지역을 점령했을 때 평양을 비롯해 북한 전역에서 노획한 문서이다. 이 가운데 개인 편지들은 문서 상자 1138번과 1139번의 두 곳에 들어 있었다. 누렇게, 퍼렇게 혹은 거무튀튀하게 색 바랜 편지들이 그득했다.

인민군 남편에게 아내가 쓴 편지, 인민군 여전사가 고향의 어머니한테 쓴 편지, 아내에게 세간살이에 미련 두지 말고 빨리 피란을 떠나라고 다그치는 남편의 편지, 월북해 인민군이 된 아들이 전라도 고향의 어머니한테 소식도 못 드리고 입대해 죄송하다며 쓴 편지, 폭격 맞아 돌아가신 아버지 사망 소식을 ‘놀라지 말라’면서 함경도 누이에게 전하는 오라버니의 편지, 평양 관리가 중국 요동성의 애인에게 쓴 편지, 아이들 죽이지 말고 잘 길러달라고 아내에게 신신당부하는 남편의 편지….

편지는 노획했을 때의 상태 그대로 편지 봉투 안에 들어 있다. 편지 봉투라고 해야 신문지를 자르거나 찢어 만든 것에서부터 누런 마분지로 봉투 흉내만 낸 것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이다. 봉투 안의 편지지도 마찬가지이다. 찢어낸 신문지 쪼가리의 가장자리 여백에다 “할 말은 마누나(많으나) 종에가(종이가) 부족하여 목적지까지 가서 하게슴니다(하겠습니다)”라고 연필로 쓴 것도 있다.

두 개의 문서 상자에는 편지 728통과 엽서 344매가 들어 있다. 모두 1072통이다. 이들 북한 문서는 한국인 연구자들이 보물단지처럼 여기는 자료이다. 노획 후 비밀로 분류해놓았던 것을 NARA가 1977년 비밀을 해제해 일반에 공개했다. 그러니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개 자료가 된 지 30년이 넘었다. 하지만 웬일인지 몇 장만 빼고 대부분의 편지는 손 댄 흔적이 거의 없었다. 열십자 모양으로 노끈에 묶인 채였다. 이 편지들이 미 정부 기관의 창고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기록 보존을 거의 목숨처럼 여기는 미국적 토양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대부분 1950년에 쓰인 것들이다. 특히 9월에서 10월 사이의 편지들이 가장 많다. 또 평양중앙우체국 소인이 찍힌 것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미군이 평양을 점령했을 때 평양중앙우체국에서 미처 배달하지 못한 편지들을 대량 노획한 것으로 추측된다. 편지는 북한 안에서만 오간 것들이 아니다. 남북을 넘나들었음은 물론 헤이룽장성(흑룡강성) 산둥성(산동성) 등 중국과 모스크바 블라디보스토크 등 소련과도 사연이 오갔다.

편지들은 개인이 개인에게 보낸 사신(私信)이지만 사신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짧으나마 뒤죽박죽 헝클어졌던 한국 현대사의 한 시기를 조명하는 1차 사료로 평가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편지 내용은 생생한 육성의 ‘전쟁 문학’에 해당하고도 남는다. 사랑, 원망, 분노, 번뇌, 탐욕, 이기심, 고뇌가 여과 없이 노출된 한 시대의 증언인 것이다.

이 책에 실린 편지 사진들은 NARA의 편지 원본을 현지에서 디지털 복사한 것이다. 한국의 국립중앙도서관은 이 편지를 포함한 노획 북한 문서 전량과 다른 한국 관련 문서를 수집하는 사업을 2004년부터 해오고 있다. 이 프로젝트에 저자 이흥환(워싱턴 소재 인터내셔널센터 선임편집위원)씨가 참여했다. 저자는 “편지에 대한 권리(literary rights)는 당연히 글쓴이, 즉 발신인이나 수신인에게 돌아가야 마땅할 것”이라며 “비록 미군 손에 들어간 전쟁 노획물이긴 하지만 ‘이건 내가 쓴 편지이다’ 또는 ‘이건 내가 받았어야 할 편지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단 한 명만이라도 나타난다면 이 편지 모음은 탄생의 소임을 다한 것”이라고 말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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