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환의 삶과 신앙] 부활절과 빨간 우산

“나는 페이스메이커다. 마라톤은 42.195㎞, 하지만 나의 결승점은 언제나 30㎞까지다. 메달도, 영광도 바랄 수 없는 국가대표…. 오직 누군가의 승리를 위해 30㎞까지만 선두로 달려주는 것! 그것이 내 목표이자 임무다. 그래도 언젠가 한 번은… 오로지 나를 위해 달리고 싶다!” 지난 주 성 금요일 저녁을 기념하며 페이스메이커라는 영화를 보았다. 가난한 집안에서 배고픔을 함께 느끼며 자란 형제. 어린 시절부터 동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던 주인공은 학교 운동회날 라면 한 박스가 부상으로 달린 달리기 시합에서 동생의 빨간우산 응원 덕에 자신의 소질을 발견하고 마라톤 선수가 된다.

그러나 왼쪽 다리가 1㎝ 짧은 신체적 결함 때문에 페이스메이커로 전락하고 만다. 동생을 위해 열심히 달렸으나 이제 세월이 흘러 자신은 낙오한 패잔병 페이스메이커다. 동생은 좋은 대학 나와 출세해 너무 바쁘고 잘 나가는 바람에 장가도 못간 노총각 2류 선수인 형에게 시간도 신경도 써줄 여유가 없다. 뒤늦게 깨달은 삶에 대한 아쉬움과 회한, 자신의 경주를 펼치고 싶은 마지막 꿈. 그는 독백한다. “평생 남을 위해 뛰어 왔지만 이제 내 인생 마지막 완주는 나를 위해 뛰고 싶다.” 마침내 그의 꿈이 실현될 마지막 올림픽게임. 그러나 역시 이 경기에서도 페이스메이커로 살아왔고 그렇게 길들여왔던 자신의 역할에만 충실하고선 30㎞지점에서 경기를 포기하려 한다. 그 때 경기장에 나타난 동생은 어린 시절 형을 응원했던 그 빨간 우산을 활짝 펴며 사랑과 존경의 눈빛으로 말한다. 당신의 경기는 지금부터라고. 그는 이 빨간 우산과 함께, 자신의 오래된 꿈과 함께, 자신의 경기를 펼친다. 죽을힘을 다해.

이 영화를 감동 깊게 소개하던 내 클래스의 한 학생얼굴이 생각났다. 중년의 한 미망인. 목사인 남편이 한창 일할 나이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단다. 모두에게 사랑받던 목사였던 남편을 여의고 슬픔에 젖어 있을 때, 그분은 이 영화를 보면서 많은 위로를 받았단다. 영화에서 빨간 우산이 펼쳐질 때 남편의 얼굴을 보았단다. 그동안 페이스메이커로 살아온 당신께 고맙고 감사하고 이제는 슬픔을 떨쳐버리고 일어나 당신의 경주를 펼치라는 격려의 소리와 함께. 이 분이 떨리는 목소리로 수업시간에 이 영화를 소개할 때 우리 모두는 소리 죽여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나 동시에 그분 얼굴에 스며있는 밝은 미소와 삶에 대한 또 다른 확신을 함께 보며 깊은 위로와 힘을 얻었다.

“오직 상처 입은 자만이 남을 치유할 수 있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칼 융의 말이다. 나는 이 영화의 빨간 우산이 펼쳐질 때, 어린 시절 즐겨하던 자치기 놀이가 생각났다. 지금처럼 많은 게임도구가 없던 그 시절 우리는 주로 대지위에서 흙과 함께 놀았다. 그 중에도 흔한 놀이가 자치기라는 일종의 땅따먹기 게임이었다. 길고 작은 막대기 두 개만 있으면 어느 곳에서나 할 수 있던 놀이. 이 땅따먹기 게임에서 한 쪽이 너무 잘 나가게 돼 승부가 일찍 결정나버리면 긴장감과 역동이 떨어져 게임이 갑자기 시들해진다. 그 때 승자는 여유롭게 “뻥거!”를 외치고 게임을 다시 시작하자고 선언한다. 일종의 승자의 여유라 할까. 그 뻥거 소리를 들을 때는 ‘아, 이제 다시 시작할 수 있겠구나!’하는 안도감과 희망에 처져있던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눈빛이 다시 살아나던 기억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부활절을 맞는다. 우리에게 부활절은 무슨 의미일까. 삶의 도상에서 돌이켜 보니 열심히 살아왔다 자부한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 아니었구나. 죽어라 달려온 인생의 경주가 페이스메이커로 살아왔음을 문득 느낄 때, 삶은 참 퍽퍽해지고 다리에 쥐가 나는 듯 힘을 잃어버린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이 때 부활의 주님이 우리에게 빨간 우산을 펼치며 말씀하신다. “뻥거!”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지금 여기가 결승점이 아니라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누구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누구 위해서 이 땅 이 인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주어진 삶의 경기를 완주해 보라고. 이 뻥거 소리, 빨간 우산과 함께 이제껏 길들였던 낡은 감각들, 습관들, 패배의식들을 벗고 새롭게 걸을 수 없을까. 새로 출발할 수 없을까. 다가오는 저 봄과 함께 부활의 희망과 함께.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목회상담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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