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칠에게도 굽히지 않은 ‘역사가의 무릎’… ‘E.H. 카 평전’
E.H. 카 평전/조너선 해슬럼/삼천리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역사란 무엇인가’의 저자 E. H. 카(Carr·1892∼1982)는 이런 말을 남겼다. “역사책을 읽을 때 그 책에 실린 사실보다 그 책을 쓴 역사가에 대해 알아야 한다.” 하지만 정작 그에 관해서는 알려진 게 많지 않다.
카에 대한 평전은 그의 제자이자 현재 영국학술원 회원인 조너선 해슬럼이 10년에 걸쳐 쓴 이 저작이 유일하다. 그만큼 카는 연구밖에 모르는 학자이자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 영국 외무부에 임시직으로 들어가 라트비아 공사관에 근무하면서 카는 러시아 문학에 심취한 것을 계기로 러시아어를 익히며 러시아 문화와 역사에 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러시아 성직자에게 배운 러시아어를 바탕으로 도스토옙스키 전기를 집필하던 그는 1919년 일어난 러시아 10월 혁명에 큰 충격을 받고 소비에트 연구에 여생을 바치게 된다.
러시아혁명사의 위대한 인물인 알렉산드르 게르첸, 미하일 바쿠닌 등 이른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전기까지 집필했던 그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살아오면서 결코 상실한 적이 없는 역사의식을 제공했고, 결국 먼 훗날 역사가로 변모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러시아혁명이다.”
동서 냉전을 불러온 20세기 세계사를 되돌아보건대 서구적 시각의 맹점은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현실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된 소련에 대한 적대감이 일종의 심리적 기제로 고착화된 데 있을 것이다. 그런 적대감으로 인해 서방 외교무대가 경직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훗날 세계적인 역사학자로 자리매김할 젊은 카는 자신의 학자적 양심과는 거리감이 있는 영국 정부의 소련에 대한 편향적인 정책을 간과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카는 한 번도 대학의 역사학과에서 정식 교수로 근무한 적이 없다. 한때 강사로 옥스퍼드대학에 임용됐지만 냉전 상황과 보수적인 풍토 속에서 냉대를 받고 나왔다.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 모교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칼리지의 명예로운 연구교수가 됐지만, 전통에 안주하고 있던 역사학과 거물 교수들을 공격하며 교육과정 개혁을 촉구하면서 마찰을 빚었다.
1941년부터 1946년까지 ‘타임스’ 부편집인을 맡아 국제관계 전문가로서 사설을 쓸 때는 비판의 예봉이 윈스턴 처칠 총리를 향했고 사사건건 영국 정부의 정책을 비판함으로써 ‘타임스’ 내부의 갈등을 일으키고 사퇴하기도 했다. “전쟁이 종결되더라도 유렵 대륙에는 러시아와 독일이라는 두 열강이 남게 될 것이다.
우리는 두 나라를 동시에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두 나라는 동유럽에 개입하려는 제3의 세력이 없는 한 적대감을 피할 수 없다. 독일에 맞서는 동맹국으로서 러시아가 유지되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동유럽을 러시아의 자유재량에 맡겨야 한다.”(188쪽)
카의 이런 논설은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처칠 총리의 정책 방향 가운데 하나를 미리 배제시키는 견제 역할을 했던 것이다. 훗날 카는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나는 동서 냉전을 배경으로 형성된 서구의 정치 이데올로기에 정면으로 반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비판하는 이들에게 내 작업이 소비에트의 정책을 옹호하는 것으로 보인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서방세계에서 이 같은 카의 학문적 입장이 광범위하게 수용됐더라면 동서 냉전은 좀 더 완화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상황은 그로 하여금 대학에서 정규직 일자리를 얻는 것을 어렵게 했다.
카는 마르크스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현실에 대한 엄격한 분석을 바탕으로 한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국제관계에서 나타나는 이상주의와 자유주의의 허약한 인식을 현실주의의 이름으로 공격했다.
소비에트가 강력한 산업국가로 발전을 거듭하던 시기까지도 영국에서는 특히 동유럽과 러시아에 대한 인식이 일천했고 대학에 학과도 갖추지 않았으며 연구소도 유명무실한 수준이었다.
그런 시기에 그는 아널드 토인비의 영향 아래 있던 왕립국제문제연구소 ‘채텀하우스’의 소비에트동유럽 연구분과를 이끌며 우수한 연구 성과를 내고 있었지만 그에겐 한 번도 국제정치학자나 역사학자로서의 독보적인 지위나 중요한 자리가 돌아오지 않았다.
게다가 당대 최고 지성인 아널드 토인비, 루이스 네이미어, 휴 트레버-로퍼, 제프리 엘턴 같은 역사가뿐 아니라, 미국의 국제정치학을 좌지우지하던 조지 케난, 멀 페인소드, 리처드 파이프스, 맥스 벨로프 같은 석학들과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그는 비타협적인 지성이었다. 그는 언제나 저항 정신을 잃지 않았고 자기 세대에서 가장 첨예한 정신을 가진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전후 영국의 정책 방향에 관한 논쟁의 틀을 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냉전이라는 힘든 시기에 서유럽 한복판에서 소비에트 연구의 금자탑을 쌓았다.
그가 1950년부터 아흔 살이 다 되어가던 1978년까지 거의 30년 동안 매달려 완성한 필생의 역작 ‘소비에트 러시아사’(전 14권)는 아직 우리 학계나 출판계에서 번역 출간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지만 이미 서방에서는 독보적인 고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책의 또 한 가지 특징은 개인사를 섬세하게 그려냈다는 데 있다. 어린 시절 이모 아멜리아의 병적인 집착, 세 번이나 결혼했음에도 천성적으로 부족했던 사회성, 평생의 정신적 동반자였던 도이처 부부(아이작과 타마라)와 나눈 교류와 우정 등은 한평생 시대와 불화하고 가족과 행복을 누리지 못한 지식인의 삶을 또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게 한다.
이 책이 주는 교훈은 또 있다. 번역자인 박원용 부경대 사학과 교수는 “우리 대학의 많은 연구자들이 자본의 달콤한 유혹을 좇아 연구주제를 설정하는 경향이 늘어남에 따라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적 발언은 점점 줄고 있는 실정”이라며 “외부 압력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문제의식을 항상 사회와의 관련 속에서 설정해 나간 카를 통해 우리 대학 사회의 구성원들이 현재 모습을 성찰하기를 희망한다”고 지적했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
GoodNews paper Ϻ(www.kmib.co.kr), , , AIн ̿
Ŭ! ̳?
Ϻ IJ о
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