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정택 (6) ‘히트곡 제조기’ 최고 전성기와 함께 온 시험

Է:2012-03-13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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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정택 (6) ‘히트곡 제조기’ 최고 전성기와 함께 온 시험

내 젊은 시절은 화려함 그 자체였다. 미8군 무대 오디션 낙방 후 맹훈련을 거듭해 탄탄한 실력으로 무장한 나는 그야말로 빛나는 활약을 하기 시작했다. 그룹사운드에서 활동하면서 미8군 무대에서도 연주자로서의 입지를 닦았다. 여기저기서 초청이 쇄도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어느 새 내가 악단을 이끄는 위치에까지 서게 됐다.

자연스럽게 ‘김정택’이라는 이름 석자가 가요계에 알려졌다. 연주는 물론이고 지휘 또한 대단하다는 평가가 쫙 퍼졌다. 대학 때 공부한 지휘법을 바탕으로 내 스스로 개발한 파워풀한 지휘는 그 자체만으로도 볼 거리였다. 거기다 수없이 많은 곡을 연주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편곡에 대한 비법도 터득했다. 나중엔 작곡까지 하면서 인기가수들의 세션맨(전문연주자)으로서 독보적인 자리를 확보했다.

1970∼80년대에 마침내 나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당시 나온 히트곡 치고 나와 연관되지 않은 게 별로 없을 정도였다. 내가 직접 작곡을 했든지 아니면 편곡이나 세션맨으로 작업을 함께 했던 것이다. TV 인기가요 순위 프로그램의 톱10 중 7∼8곡이 내 손을 거친 곡일 정도였다. 그때부터 나에는 ‘히트곡 제조기’라는 별명이 붙었다.

덕분에 돈벌이가 좋았다. 작곡·편곡·연주료로 들어오는 돈이 쏠쏠했다. 방송사나 정부에서 주관하는 대형 이벤트에 끊임없이 불려 다니기까지 했다. 그런 가운데 마음에 쏙 드는 아내와 결혼해 아이까지 낳고 행복한 가정도 이뤘다. 그야말로 ‘김정택의 전성시대’였다.

어디를 가도 나는 최고의 연주자로 대접받았고, 가수들은 내 곡을 받기 위해, 그리고 나와 공연을 하기 위해 안달을 했다. 전영록의 ‘불티’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 봐’, 인순이의 ‘밤이면 밤마다’, 심수봉의 ‘미워요’, 현숙의 ‘정말로’ 등 내가 작곡한 곡들이 연이어 히트를 쳤다.

그때 내가 고정적으로 서는 무대는 서울 퇴계로2가 퍼시픽호텔에 있는 극장식 나이트클럽인 ‘홀리데이 인 서울’이었다. 많은 연예인이 그 무대에 섰고 외국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진 관광명소였다. 나는 연주도 했지만 주로 지휘봉을 잡고서 관객들을 홀렸다. 온 몸으로 하는 나의 격정적인 지휘는 관객들의 큰 인기를 끌었다. 40분씩 이어지는 공연이 한 차례 끝나면 내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얼른 새 옷을 갈아입고 무대에 올라갈 정도였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공연이 끝난 뒤 안기부 관계자가 귀순한 북한의 고위 인사라며 한 남자를 데려와 인사를 시켰다. 자본주의를 소개한다는 명목으로 공연장을 찾았다는 것이다. 내가 “대한민국에 오신 걸 환영한다”며 인사를 하자 그는 의아하다는 눈으로 빤히 나를 쳐다보며 “선생님은 약을 잡쉈습네까”라고 하는 거였다. 그의 눈에 내 모습이 마치 마약에 취한 사람처럼 보였던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온 몸을 흔들며 정신없이 지휘할 수 있겠나 싶었던 것이다.

어쨌든 나는 연주자로서 고정 팬을 확보하게 됐다. 가수도 가수이지만 내가 이끄는 악단의 연주를 보기 위해 오는 이들도 꽤 많았다. 무대의 내 모습이 잘 보이는 테이블은 항상 만석이었다. 공연을 마치고 나갈 때는 나를 만나기 위한 극성스런 팬들 때문에 뒷문으로 도망을 쳐야 했다.

이런 식으로 세상에서 나는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그와 반비례해 내 영혼은 갈수록 피폐해져 갔다. 당시엔 그걸 몰랐다. 공연을 마치거나 큰 행사를 마무리하면 동료들과 어울려 한 바탕 술을 퍼마시기 다반사였다. 예술하는 사람들의 멋이라며 하루 몇 갑씩 담배를 피워대고 온갖 겉 멋을 부리기에 바빴다. 이런 나를 지켜보는 하나님의 심정이 얼마나 안타까우면서 아팠을까. 그러다 결국 하나님은….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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